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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자 이언적을 기리는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사적 제154호
    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3. 3. 13. 17:12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The property is located in central and southern parts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comprises nine seowon, representing a type of Neo-Confucian academy of the Joseon dynasty (15th -19th centuries CE). Learning, veneration of scholars and interaction with the environment were the essential functions of the seowons, expressed in their design. Situated near mountains and water sources, they favoured the appreciation of nature and cultivation of mind and body. The pavilion-style buildings were intended to facilitate connections to the landscape. The seowons illustrate a historical process in which Neo-Confucianism from China was adapted to Korean conditions.

    Description is available under license CC-BY-SA IGO 3.0

    Current view of Dosan Seowon in 2013 © Council for Promotion of the Inscription of Confucian Academies on the World Heritage List

    Outstanding Universal Value

    Brief synthesis

    The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is a serial property which comprises nine seowon representing a type of Neo-Confucian academy of the Joseon Dynasty (from the mid-16th to mid-17th centuries CE). It is an exceptional testimony to cultural traditions associated with Neo-Confucianism in Korea.

    The components are Sosu-seowon, Namgye-seowon, Oksan-seowon, Dosan-seowon, Piram-seowon, Dodong-seowon, Byeongsan-seowon, Museong-seowon and Donam-seowon, and these are located across the central and southern parts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property exhibits an outstanding testimony to thriving Neo-Confucian academies that promoted learning of Neo-Confucianism, which was introduced from China and became fundamental to every aspect of Korea.

    The local literati at seowon created educational system and tangible structures conducive to fully commit themselves to learning. Learning, veneration and interaction were the essential functions of the seowon which are closely reflected in their design. The seowon were led by sarim or the class of local intellectuals. The seowon developed and flourished as centres for the interests of the sarim.

    The primary factor in siting the seowon was the association with venerated scholars. The second factor was the landscape, and seowon are located near mountains and water as part of appreciating nature and cultivating the mind and body. Pavilion style buildings in the seowon facilitated connections to the landscape.

    The scholars studied Neo-Confucian classics and literary works and endeavoured in understanding the universe and becoming ideal person. They venerated late contemporary Neo-Confucian figures, and formed strong academic lineage spearheaded by venerated scholars. Furthermore, local literati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 to disseminating principles of Neo-Confucianism through various social and political activities based on the property.

    Criterion (iii): The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are exceptional testimony to cultural traditions associated with Neo-Confucianism in Korea, in the form of educational and social practices, many of which continue. The seowon illustrate an historical process in which Neo-Confucianism from China was tailored to Korean local conditions resulting in academies which are exceptional testimony of this transformative and localising process in terms of function, planning and architecture.

    Integrity

    The property retains all attributes that reflect the Outstanding Universal Value of the property. These are the buildings and constructions constituting the seowon, ancillary buildings, entrance gate, dismounting stele, commemorative stele, immediate environments including hills, streams, roads, plantings and visual catchments. The attributes of the property are generally in excellent condition.

    The major pressures on the property, development, insect damage, fire, earthquakes and visitors, are being adequately managed. However, they should continue to be monitored.

    Authenticity

    The property meets the requirements of authenticity. The form and design, and materials and substance are basically intact. The use and function of the seowon, and their traditions, are largely as they were through history, although noting that the educational role has been largely diminished. The location and setting of the seowon have been generally retained, although it is noted that two components have been relocated in the historical past. The intangible heritage, and the spirit and feeling of the seowon have been generally retained.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사적 제154호

     

    종목 사적 제154호
    명칭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26,063㎡

    지정일

    1967.03.08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

    국유,사유

    관리

     

    설명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옥산서원 → 경주 옥산서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아름다운 계곡옆에 옥산서원이 자리하고

     

     

     

     

     

     

     

     

     

     

     

     

     

     

     

     

     

     

     

     

     

     

     

     

     

     

     

     

     

     

     

     

     

     

     

     

     

     

     

     

     

     

     

     

     

     

     

     

     

     

     

     

     

     

     

    이언적 [李彦迪]

    1491(성종 22) 경북 경주~ 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성리학

    의 이설(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1.을사사화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547년(명종 2) 9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났다. 이는 양재역에 붙어있던 벽서의 내용을 구실로, 을사사화의 가해자였던 윤원형일파가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을사사화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청주에 내려와 있던 송인수(1499-1547)는 이로 인해 이약빙과 함께 사형당하고 이언적․노수신․유희춘 등 수십 명의 사림이 귀양을 갔다.  2.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 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 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 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 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 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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