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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서원 (龍山書院)-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3. 11. 13:30
용산서원 (龍山書院)-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
종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 명칭
용산서원 (龍山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8,138㎡ 지정일
1993.02.25 소재지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외 2필 시대
소유.관리
최채량,경주최씨가암파문중 설명
정무공 최진립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잠와 최진립(1568∼1636)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죽은 뒤에 지금의 장관격인 병조판서 직함을 받았고 청백리로 기록되었다.
숙종 25년(1699)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37년(1711)에 ‘숭렬사’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구조는 전학후묘로 앞면에는 공부하는 공간인 민고당, 뒷면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숭렬사가 있다. 서원 오른쪽에는 관리사가 있고, 서원 입구에는 신도비각이 서 있다.정무공 최진립(1568∼1636)
1.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 때 울산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 도사(都事)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능창군 추대 사건(선조의 서자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후 복직되어 가덕 첨사(僉使)로 복귀했다. 그 뒤 경흥부사,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가 되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했으며 1634년(인조 11) 전라수사를 지냈다. 공주 영장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충청관찰사 정세규가 출정하면서 연로한 공에게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참전을 만류했다. 그러나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보니 공이 먼저 와 있었다. 정 감사가 “어찌 여기 왔소”라고 물었더니 “임금이 포위를 당해 있고, 주장(主將)이 전장으로 나아가는데 어떻게 물러나리요. 또한 나라에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주장과 같이 죽으러 왔소”라고 대답하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잘 훈련된 청나라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평소 그림자처럼 따르던 두 종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에게 “너희들 중에 나를 따를 사람은 이 옷을 받아 입어라”하고 옷을 벗어던지자 기별이 울면서 옷을 주어 입고 “주인이 충신이 되는데 어찌 종이 충노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뒤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청백리로 뽑혔으며, 경주 용산서원 등에 제향되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았다.'문화재 > 내가 본 시도기념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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