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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orld Heritage Gyeongju Historic Areas-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Hwangnyongsa Temple Site, Gyeongju-사적 제6호
    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3. 3. 8. 22:23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World Heritage Gyeongju Historic Areas

     

    -사적 제6호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종목 사적 제6호
    명칭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수량 380,087㎡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
    시대 신라
    소유 국유,사유
    관리 경주시
    설명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황룡사(皇龍寺)는 신라에서 흥륜사에 이어 두번째로 이룩된 7처(處) 가람지(伽藍址) 중의 하나이다. 분황사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황룡사는 신라 3보(寶) 중 금동(金銅) 장육(丈六) 존상(尊像)과 9층 목탑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잡초 우거진 들판에 초석만 남아 있지만, 그 옛날 신라 역대의 왕들이 친히 나가 고승의 강연을 경청한 100고좌(高座) 강회(講會)가 열렸던 호국 불교의 대가람이다. 황룡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55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차 공사를 끝내는 데 1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9층탑이 완성되어 절의 모습이 완전히 갖추어지는데는 93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정성으로 이룩된 황룡사가 모습을 감추게 된 것은 고려 시대인 1238년 몽고 침략군이 불을 질러 버린 탓이었다. 그 후 1976년부터 8년간에 걸쳐 황룡사 터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행해졌다. 그 결과 9층 목탑과 금당(金堂)이 남북으로 배치되었던 것이 밝혀졌는데, 금당 좌우에 또 다시 동, 서로 금당이 세워져 있었음이 함께 밝혀졌다. 이로 미루어 황룡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1탑 3금당식의 가람 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적 제6호이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황룡사(皇龍寺)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난으로 소실(燒失)될 때까지 양대 왕조에 걸쳐 700여 년간 법등(法燈)을 이어온 호국사찰(護國寺刹)이었다. 특히, 진흥왕 35년(574)에 주성(鑄成)된 장육삼존불(丈六三尊佛)과 선덕여왕 14년(645)에 건립된 구층목탑(九層木塔)은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진평왕 옥대(玉帶)와 더불어 신라삼보(新羅三寶)로 일컬어졌다.

    1976년∼1983년까지 8년간에 걸쳐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하여 발굴된 황룡사지는 남문(南門)·중문(中門)·목탑(木塔)·중금당(中金堂)·강당(講堂)이 남북일직선상에 놓이고 삼금당(三金堂)이 동서로 나란히 배치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배치였음이 확인되는 등 고대가람 연구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창건 이후 4차례의 변천과정을 거친 다음 9세기 중엽에 완성된 최종가람의 경역은 24,700평에 달하며, 회랑 내곽의 면적이 8,700평에 이르러 1,100평에 불과한 불국사에 비하여 8배나 큰 규모이다. 또한 사역을 구획하는 외곽의 정방형 석축담장은 1변 길이 285m 안팎으로 확인되어 1방(坊)의 크기가 140∼160m로 구획된 신라왕경(新羅王京) 조방제하(條坊制下)에서 4개 방(坊)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단위 건물지 단면조사시 기단토 아래에서 황룡사터의 바닥이 늪지였음을 증명하는 뻘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불사로 고쳐지었다…」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는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 40,0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각 건물에 사용되었던 와전류(瓦塼類)가 대부분이고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용기류(容器類)와 불상(佛像) 등 금속류(金屬類)도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금당 북쪽에서 출토된 182cm 높이의 대형 치미는 가람(伽藍)의 웅장함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목탑지(木塔址)의 심초석(心礎石) 아래에서 출토된 작은 백자호(白磁壺)는 당(唐)의 유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文物交流)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http://www.gcp.go.kr/data/data_view.jsp?id=117&groupcd=02

     

     

     경주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는 이 절터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황룡사(皇龍寺)는 규모나 사격(寺格)이 신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절터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곳으로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라 하였는데 이는 신라 땅이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절로 고쳐짓기 시작하여 17년만에 완성하고 황룡사라 이름하였다. 그 후 574년 천축(天竺)의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釋迦三尊佛像)을 만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 금과 철을 바탕으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이 삼존불상 중 장육존상은 금 10,198분·철 35,007근으로, 두 보살상은 철 12,000근·금 10,136분을 들여 만들었으며 이들 불상을 모시기 위하여 금당(金堂)을 고쳐지어 584년에 완공하였다.

    643년(선덕여왕 12)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국가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고자 청을 올려 9층목탑(九層木塔)을 조성하였는데 이 목탑은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와 신라의 용춘(龍春)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 목탑은 전체 높이가 225척이었으며 자장이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신라삼보인 이 목탑과 장육존상은 1238년 몽고의 침입에 의하여 불타고 그 후 고쳐짓지 못하였다.

    황룡사(皇龍寺) 가람배치(伽藍配置)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평면 배치와 가람의 변천상이 밝혀졌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황룡사의 가람배치에 변화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1탑식 가람배치이다. 즉 중문(中門)·목탑(木塔)·금당(金堂)·강당(講堂)이 남북으로 길게 일직선상에 중심축을 두고 자리하며 이들 중심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回廊)이 있고 중문의 남쪽에는 남문이 있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되고 난 다음 완성된 황룡사 중창가람은 목탑의 북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중앙 금당의 좌우측에 규모가 작은 금당이 각기 배치되는 1탑 3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탑의 앞쪽 좌우에 경루(經樓)와 종루(鐘樓)가 대칭을 이루고 배치되기도 하였다. 황룡사의 종루에는 754년(경덕왕 13)에 구리 497,581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데 몽고의 침입시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에서는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풍탁(風鐸)·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높이 182cm에 이르는 치미(치尾)는 황룡사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신라에 있었다는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황룡사 금당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벽화가 있었고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菩薩戒本)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강설한 곳이다. 그리고 역대 왕들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강당에 친히 와서 고승이 모여서 마련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에 참석하여 불보살의 도움을 빌었다. 즉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주요하고 규모가 큰 가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 가람이었다.

     

    http://www.gcp.go.kr/cultural/cul_view.jsp?id=109&category=0&subtype=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https://youtu.be/v4bIeupu3yA?t=1565

    https://youtu.be/hsZpV2epn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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