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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호정 (風乎亭)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21. 2. 7. 14:52
풍호정 신지(申祉) 18世 (1424 ~ ? )
신지는 평산신씨 판사공파 파조인 신득청의 증손자이고 조부(祖父)는 신예(申藝)로 고려 중랑장(中郞將)이다. 아버지는 연남재(戀南齋) 신영석(申永錫)으로 교도관(敎導官)이었다. 선친 신영석은 형제 중석과 쌍생아(雙生兒)로 태어나 네 살 때 고아가 되었다. 이때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스승의 가문에 대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신영석을 강원도 원주로 데려가 키워서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런 연유로 신영석은 두 아들에게 반드시 남쪽 고향땅으로 가도록 유언하였으며, 신지는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합강동(合江洞)에 이사하여 입향시조(入鄕始祖)가 되었다.
신지의 자는 독경(篤敬), 호는 풍호(風乎)이다. 1463년(세조 9)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였다. 신지는 어릴 적부터 풍채(風采)가 늠늠하고 재기가 비범하였다.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써 많은 문집(文集)과 시서(詩書)를 익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친척 및 인근 어른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외조부를 따라 진보(眞寶)에 왔다가, 부친과 모친이 하루 사이에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상을 맞음에 성의를 다하여 예에 맞게 상을 치르고 3년 동안 피눈물로 시묘 살이를 하였다. 80세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당(祠堂)에 배읍(拜泣)하였다. 언제나 친히 술잔을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고, 제전(祭田)을 많이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세조(世祖) 때 진사시(進士試)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갈 뜻을 접고 초아에 묻혀 평소의 소신대로 살았다. 1463년(세조 9) 효행(孝行)과 청렴(淸廉)으로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이 학문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나가지 않았다.
만년(晩年)에 진보로 돌아와 합강(合江) 상류(上流)에 풍호정(風乎亭)을 짓고, 동생 신희(申禧)와 더불어 늙도록 서로 같이 즐겼으며, 여러 선비와 시와 술을 함께 나누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풍호정
진보면(眞寶面) 소재지에서 안동-영덕선 국도 서쪽으로 약4Km에 이르면 합강동(合江洞) 언덕위에 고목이 어우러진 숲속에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 정자가 바로 풍호정(風乎亭)이다. 화강암 층 위에 세워진 이 풍호정에 앉아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면, 동쪽에는 비봉산(飛鳳山)이 솟아있고 서쪽에는 높은 산이 펼쳐져 있으며 호명천(虎鳴川) 건너편에는 작약산(芍藥山)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상류에서 바위층을 감돌며 굽이쳐 흘러내리는 시냇물은 소(沼)를 이루고 또한 늪을 이루어 그 신비로운 자연의 풍치가 한 폭의 빼어난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풍호정(風乎亭)은 신지(申祉)가 말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교남지?(嶠南誌)에 따르면, 그의 아들 신명창(申命昌)이 주관하여 향촌유림과 후손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앞쪽에 흐르는 반변천을 바라보며 풍호정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ㅁ자형 민가인 풍호정 주사가 있고, 왼쪽으로는 비각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풍호정은 대지의 약한 경사를 이용하여 정면(正面)을 놓게 하여 누각 형태의 정자를 만들었다. 평면은 중당협실형으로 중앙마루를 중심으로 좌우협간에 온돌방을 두었고, 전면에 퇴간(退間)을 내고 2자정도 마루를 확대하여 계자난간을 돌렸다. 온돌방은 전면과 마루 쪽으로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측면에도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아 출입이 매우 용이하도록 하였다. 중앙의 마루는 전면에 사분합 들문을 달고 배면은 골판벽에 쌍여닫이 골판문을 달아 폐쇄형으로 꾸몄다. 그리고 벽체는 심벽으로 처리하고 회분벽으로 마감하였다. 기둥은 전면만 원주를 세우고 무익공 소로수장으로 주상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측면과 배면은 굴도리로 처리하였다. 상부가구는 5량가 구조를 취하면서 파련대공형에 공아를 삽입하여 종도리를 지지시켰다. 그리고 퇴량은 내진주 위에서 합보되면서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를 받게 하였다. 지붕은 팔작형으로 처리하였으나 정면 지붕에 후림과 조로를 두지 않아 천연스러운 맛은 없다. 정자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1683년(숙종 9)에 중수하였으며 1947년에도 중수한 바 있다고 한다. 따라서 본 건물은 1947년 중수시 거의 원형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수전의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중수전에는 어간(御間)과 좌협간(左夾間)에 온돌방이 자리하고 우협간(右夾間)이 마루로 구성된 평면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계자난간이 아닌 헌함형식으로 전면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지붕의 와곡(瓦曲)이 뚜렷하여 고태가 있었으나 중수 후 당시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풍호정 옆에는, 신지의 후손인 신예남 부부가 임진왜란 당시 세운 공을 기리는 쌍절비각이 있다. 민가인 주사는 전면 4칸 측면 4칸 규모에 ㅁ자형 구조를 한 건물로, 경상북도 북부지방 민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누정이야기
‘풍호’라는 말은 ?논어?에서 유래하고 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모두 학업을 성취하면 장래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기탄없이 말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제자들은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원했는데, 증점(曾點)만이 “저는 봄철 새 옷이 마련되면 몇 명의 벗과 몇 명의 동자를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후 무우(霧雩)땅에 바람 쏘이고 시를 읊다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공자가 마음속으로 흡족해 하시며 찬성하였다. ‘풍호’라는 말은 ‘바람쏘이며 여유롭게 노닌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합강 하류에는 속칭 무우리 부락과 무우대가 있다. 이 풍호정에 앉아 있으면 속된 사사로운 생각은 강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맑고 높은 숭고한 이념만 스스로 간직하게 된다. ?풍호정서?(風乎亭序)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정자를 세운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증점(曾點)의 뜻을 상상하고 공자께서 허락하신 말씀으로 지은 것이다. 내가 증점과 더불어 천지의 본성을 함께 받고 한가지로 공자의 도를 배웠으니, 이러한 마음이 증점과 다름이 있겠는가. 늦은 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는 날에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는 뜻을 발하려 하여도, 기수는 멀고 무우는 보이지 않으니 이 마음이 갈 바를 이끌어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에 개연히 이 땅에 터를 잡으니 푸른 절벽이 깎아 지른 듯 서 있고 푸른 물이 굽이쳐 흘러서 바위 기슭을 개척하여 정자를 지었다. 흐르는 냇물을 굽어 내려다보면 기수와 무우의 즐거움이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이곳에 있다. 이에 두세 사람과 더불어 정자 아래에서 목욕하고 정자 위에서 바람 쐬며 종일을 소요해서 시 읊고 노래하며 돌아오는 것이 이 정자를 ‘풍호’로 이름 지은 까닭이다. 밖으로는 때를 씻어내어 그 몸을 깨끗이 하고 안으로는 모든 찌꺼기를 씻어 버려 마음을 깨끗이 하고자 한다. 산천의 경치가 족히 감상할 만하고 어조를 구경하는 즐거움이 또한 정신을 수양하여 가슴속이 혼연하게 되어 바로 천지 만물과 더불어 상하로 유통하게 된다. 각각 그 장소에 마땅함을 얻는 뜻이 은연중에 스스로 나타난다. 아! 풍호의 뜻을 완상하는 사람은 크게 스스로 얻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증점의 높은 뜻을 상상하고 증점의 거칠 것 없는 마음을 경계하여, 한갓 그 이름만 좇지 말고 반드시 그 실지를 실천하는 것이 내가 이 정자를 지은 본 뜻이다.”
豊 柳 마 을 | Re:風乎亭 申祉 先生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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