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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승전비 (梁憲洙勝戰碑)-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2. 24. 08:47
양헌수승전비 (梁憲洙勝戰碑)-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종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명칭
양헌수승전비 (梁憲洙勝戰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95.11.14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2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전등사 설명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를 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프랑스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 시켰다가 밤에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4년(18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 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부총관·금위·어영 등을 거쳐 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비는 긴 직사각형으로, 윗변을 둥글게 다듬었다. 고종 10년(1873)에 세운 것으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양헌수 [梁憲洙] 1816(순조 16)~ 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호는 하거(荷居). 아버지는 부사정 종임(鍾任)이다. 이항로(李恒老)에게서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는 법을 익혔다.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며, 도총부경력·훈련원첨정을 거쳐 1854년(철종 5) 희천군수가 되었다. 그뒤 어영초관·갑산부사·어영청좌부천총을 거쳐, 1864년(고종 1)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부임했다. 1866년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대원군의 프랑스 신부 처형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오자 서울 방비를 위해 주교도청(舟橋都廳)·훈련도감좌별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순무영천총(巡撫營千摠)으로 선봉이 되어 강화도로 출정했다. 10월 1일 적군 몰래 강화도로 건너가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입성하여 진을 쳤다. 10월 3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분견대 160명이 정족산성을 공격해오자 매복작전으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혀 적을 격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약탈, 방화한 뒤 철수했다. 이 공으로 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1868년 어영중군,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 1873년 어영대장을 지냈다. 1874년에는 좌포도대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형조판서·금위대장 등을 지냈다. 1875년 1월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모리야마[森山茂]가 가져온 새 서계(書契)의 접수 여부가 문제가 되자 지훈련도감사로서 일본의 서계를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이후 일본이 개항조약을 강요하자 이에 반대하는 척화론을 폈다. 그뒤 1879년 도총부도총관, 1882년 지삼군부사, 1884년 공조판서, 1887년 춘천부유수 겸 독련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하거집〉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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