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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성 어재연․어재순 묘소 (陰城 魚在淵․魚在淳 墓所)- 충청북도기념물 제162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8. 10. 16. 14:26

     

    음성 어재연․어재순 묘소 (陰城 魚在淵․魚在淳 墓所)

    -충청북도기념물 제162호

     

     

     

     

     

     

               

     

     
     
     

    종목

    충청북기념물 제162호

    명칭

     

    음성 어재연․어재순 묘소

    (陰城 魚在淵․魚在淳 墓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근대무덤 / 근대무덤

    수량

    2기

    지정일

    2014.10.02

    소재지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 68-7

    시대

    대한제국시대 [조선시대 (1871년)]

    소유.관리

    함종어씨 충장공파 종중,

    설명

    음성 어재연·어재순 묘소(陰城 魚在淵·魚在淳 墓所)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2014년 10월 2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신미양요(1871년)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전사한 강화 유수부 병영인 진무영 중군 어재연과 형을 따라 자진 참전하여 순절한 동생 어재순의 묘소이다.

    묘소가 자리한 좌우 능선은 토성이고 성내는 경작지에서 통일신라 후기 이래의 기와, 토기, 자기조각이 많이 발견되는 유물 산포지를 이룬다.

    https://ko.wikipedia.org/wiki/음성_어재연·어재순_묘소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_kdcd=&s_ctcd=33&ccbaKdcd=23&ccbaAsno=01620000&ccbaCtcd=33&ccbaCpno=2333301620000&ccbaLcto=37&culPageNo=3&header=region&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RegionList.do&assetname=00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빈 칸이 많다.

     
     

     

     

     

     

     

     

     

     

     

     

     

     

     

     

     

     

     

     

     

     

    쌍충재

     

     

     

     

     

     

     

     

    어재순 묘

     

     

     

     

     

     

     

     

    어재연 장군묘

     

     

     

     

     

     

     

     

     

     

     

     

    좀 아쉽다. 관리가

    2014년 10월2일 지정되었지만 안내판도 없다.

     

    어재연(魚在淵)

    본관은 함종. 자는 성우(性于). 아버지는 용인(用仁)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주부·판관·첨정·총위영초관·형조정랑을 역임한 뒤 1847년 광양현감이 되었다. 재임시 환곡 업무를 공정히 처리하고, 옥사를 잘 다스렸으며, 군기수선을 잘 하여 통정대부로 승급되었다.

    1856년(철종 7) 해주진영 병마절도사를 거쳐 풍천부사가 되었다. 1862년 대구영장을 거쳐 1864년(고종 1) 장단부사가 되어 공정한 과세를 위해 힘써 고종에게서 표리를 하사받았다. 1866년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그해 프랑스 로즈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오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방어했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도적들을 토벌하고, 관내의 개시를 복구했으며, 별포대(別砲隊)를 설치해 국경 수비를 튼튼히 했다.

    1871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신미양요), 4월 15일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로 급파되었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수륙양면에서 함포사격과 야포사격을 퍼붓고 광성보로 돌입하자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적군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말의 대학자 이건창(李建昌)은 그를 평하여 "청백강정(淸白剛正)해서 이르는 곳마다 이름난 공적을 남겼다. 체격이 장대하고, 절인(絶人)의 힘이 있어서 세상사람들은 그를 장사(壯士)로 여겼다"고 했다. 병조판서 겸 지삼군부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이다.

    85문의 대포와, 1,230명의 미해병대 병력을 싣고 1871년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한 미국 군함 5척(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이 6월 1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면전쟁이 최종목적은 아니고, 무력시위를 하여 개항을 하게 하려는 포함외교가 목적이었다.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이 총에 맞아 자결하였음으로, 비롯하여 240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로 잡혔으며, 미해병대는 3명 전사, 6명 부상을 입었다. 

    어재순(魚在淳)

     

    어재순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홀로 대소가를 지키며 은거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신미양요가 발생, 형 어재연이 진무중군이라는 막중한 중책을 지고 광성보(廣城堡)에 농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분연히 궐기, 형을 따라 미군을 격퇴할 결심을 굳히면서 백의종군을 선언하자, 일가친지들은 지금 강화도에는 적선이 바다를 메워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적이 두려워서 어찌 나라를 구하는 일을 못하랴.”라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광성보로 달려갔다. 어재연 중군이 아우 어재순을 보고 “너는 궁벽한 고을의 일개 포의에 불과한 몸이다. 너는 왕사(王事)로 죽는 나와는 다르다. 어찌 빨리 돌아가지 못하겠는가.”라고 꾸짖으니,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일에는 신민(臣民)이 하나라고 말하면서 일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형과 같이 칼을 빼어들고 선두에서 미군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정부는 어재순을 이조참의에 추증하고, 백의충절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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