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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선생유허비 (朴彭年先生遺墟碑)-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3. 2. 18. 16:21
박팽년선생유허비 (朴彭年先生遺墟碑)-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명칭
박팽년선생유허비 (朴彭年先生遺墟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89.03.18 소재지
대전 동구 우암로 326번길 28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동구 설명
유허비는 옛 선현의 자취를 살피어 후세에 전하고 그를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인 박팽년(1417∼1456)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과거에 두 번이나 급제하여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때에는 신숙주·성삼문·유성원 등과 함께 집현전의 학사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펴다 실패로 끝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치었다. 이 후 그의 높은 절의를 기리어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는 선생이 계시던 옛 건물터의 주춧돌들을 모아 세운 것으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현종 9년(1668)에 세웠으며,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글에,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겼다. 현종 13년(1672) 비각을 세우고 ‘장절정(壯節亭)’이라 이름하여 비를 보호하고 있다.박팽년 [朴彭年]
1417(태종 17)~ 1456(세조 2). 조선초기의 문신.
관직생활과 세조의 즉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중림(仲林)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으면서, 그를 비롯하여 황보인·김종서·성삼문 등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했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부제학을 거쳐 1454년 좌승지·형조참판을 지냈다. 145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신권의 지나친 강대화와 왕권약화를 우려한왕실세력 중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등을 축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세조에게 올리는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대신 '거'(巨)라는 글자를 쓰고 녹봉에도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다시 형조참판에 기용되었다.
단종복위운동
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집현전 출신의 관료가 요직에 많이 등용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 대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등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는 조치에 대해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와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유신들은 마침내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하려 했다. 당시 형조참판으로있던 박팽년은 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 등 대부분 전직·현직 집현전 유신들과 함께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456년 6월에 창덕궁에서 상왕인 단종 앞에서 명(明)의 사신을 접대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의 호위를 맡은 성승(成勝)·유응부 등이 세조와 그추종자들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갑자기 세조가 이들의 시위(侍衛)를 취소시켰으므로 거사를 후일로 연기했다. 이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 등이 불안을 느끼고 이를 밀고해 성삼문 등 주모자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가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려 했으나,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다. 얼마 후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순(珣)·분(奮) 등 3대가 처형되었으며, 어머니·처·제수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으로 노비가 되었다. 1691년(숙종17)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 秋江集〉에 사육신전을 적어 그를 비롯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6명의 충절을 기렸다.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글씨가〈취금헌천자문 醉琴軒千字文〉에 남아 있으며 묘는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묘역에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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