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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개현구장도 (花開縣舊莊圖)-보물 제1046호
    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7. 3. 2. 11:10

    화개현구장도 (花開縣舊莊圖)

    -보물 제1046호

     

    종목

    보물  제1046호

    명칭

    화개현구장도 (花開縣舊莊圖)

    분류

    유물 / 일반회화/ 산수화/ 산수화

    수량

    1점

    지정일

    1990.09.20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소유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일반설명

    조선 전기의 문신 정여창(1450∼1504) 선생의 지리산의 별장을 그린 그림이다. 정여창 선생은 성종 14년(1483)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이 그림은 정여창 선생이 한동안 성리학과 오경을 연구하면서 머물렀던 별장이 훼손되는 것이 아쉬워 정씨 문중에서 이징(李澄)을 불러 그리도록 한 것이다. 가로 56㎝, 세로 89㎝의 크기로 명주 바탕에 그렸는데, 화면의 맨 위에는 “화개현구장도”란 제목이 전서체로 적혀 있고, 중간에는 별장의 주변 산수를 엷게 채색하여 그렸다. 그림 전체의 배치가 오른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근경, 중경, 후경이 잘 나타나 있고 산과 바위에는 흑백의 대조가 뚜렷하다. 그림 아래에는 정여창과 유호인의 시와 제작배경을 적은 글, 그리고 조식과 정구의 글에서 발췌한 글이 있다.

    인조 21년(1643)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일종의 기록화로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록을 참고하여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17세기의 안견화풍을 잘 보여주고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안견화풍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복제품이

     

     

     

     

     

     

     

     

     

     

     

     

    그림의 상단에는 ‘花開縣舊莊圖(화개현구장도)’라는 전서체(篆書體)의 표제가 적혀 있다. 중단에는 구장이 있던 화개현(花開縣)의 산수가 그려져 있다.

    하단에는 정여창의 악양시(岳陽詩) 1수, 유호인(柳好仁)의 악양정시서(岳陽亭詩序)와 시,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을 밝힌 신익성(申翊聖)의 후지(後識), 조식(曺植)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과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 중에서 정여창의 구거유적(舊居遺跡)에 관한 기사의 발췌 등이 신익성의 글씨로 적혀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일종의 기록화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계회도(契會圖)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그림은 이징에게 요청하여 그린 것이다. 이징이 직접 현지에 가서 실사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록들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임을 하단에 적힌 신익성의 발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 기록화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징이 만 62세 때인 1643년에 제작한 것이 신익성의 발문에 의하여 확실하게 밝혀졌다. 이로써 연기(年記)를 철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가였던 이징의 화풍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시대의 유교 문화의 양상을 고찰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이징의 원숙한 산수화 솜씨가 잘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격조가 높고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17세기적 양상을 잘 보여 준다. 오른쪽 종반부(縱半部)에 무게가 치우쳐 있으면서 근경(近景)·중경(中景)·후경(後景)이 갖추어진 이른바 편파3단구도(偏頗三段構圖)를 이루고 있다. 좌우로 확산된 공간의 표현이 두드러져 조선 초기 이래의 안견파 산수화의 전통이 역연하다. 그러나 산과 바위의 표현에는 흑백의 대조가 엿보이는 등 절파적(浙派的) 요소도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이징과 조선 중기의 산수화 및 유교 문화의 고찰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정여창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로 죽었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9j1290a이징

    이징은 동양화의 주요 소재가 되는 산수, 인물, 영모, 묵죽, 화훼 등 모든 분야에 두루 뛰어나 17세기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1609년 중국 사신을 맞이하러 의주로 가는 원접사의 수행화원을 했으며, 1623년에는 유희경의 요청으로 <임장도>를 그리기도 했다. 1628년 태조의 초상화를 보수작업에 참여했다. 만년에는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깝게 지내며 화법을 익히기도 했다. 산수화와 영모화, 화조화가 주로 전해진다. 산수화에서는 조선 초기의 안견파 중기의 절파계를 융합한 화풍을 즐겨 구사했으며, 궁정취향이 짙은 이금산수화도 잘 그렸다. 영모화 및 화조화에서는 절파풍이 가미된 묵법을 토대로 서정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말·기러기·원앙새 등을 많이 그렸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8a047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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