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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정지석탑 (南海鄭池石塔)-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2호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5. 8. 10. 19:39
남해 정지석탑 (南海鄭池石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2호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2호
명칭
남해 정지석탑 (南海鄭池石塔)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1 기
지정일
1983.07.20
소재지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768번지
시대
소유.관리
남해군
설명
고려 우왕 9년(1383) 정지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남해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은 것이다.
큼직한 자연바위를 받침 삼아 그 위에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은 사각형 4개, 조그만 원형 1개의 몸돌과 지붕돌 5개로 번갈아 층층히 쌓아 올렸다.
소박한 모습의 탑으로, 왜구로부터 남해지방과 백성들을 구한 애국정신이 고스란이 담겨 있어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정지
Jeong Ji , 鄭地준제(准提), 경렬(景烈)
시대 : 고려후기 출생 : 1347년(충목왕 3) 사망 : 1391년(공양왕 3) 경력 : 중낭장, 전라도안무사, 지문하부사, 문하평리,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 판개성부사 유형 : 인물 관련사건 : 관음포전투 직업 : 관리, 무신 성별 : 남 분야 : 역사/고려시대사 본관 :나주(羅州) 요약 : 고려후기 문하평리,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개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초명은 정준제(鄭准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74년(공민왕 23)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낭장으로 전라도안무사로 발탁되었다.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하고, 이듬해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島元帥)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가 되었다. 정지는 1383년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경상도로 가서 합포의 군사를 모아 정비하였다. 이때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도달하였고 정지가 이끄는 군사와 박두양(朴頭洋)에서 대치하였다. 정지는 관음포전투에서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동참하였다. 이 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光州)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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