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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박소 신도비 (陜川 朴紹 神道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1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5. 3. 7. 23:10
합천 박소 신도비 (陜川 朴紹 神道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1호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1호
명칭
합천 박소 신도비 (陜川 朴紹 神道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동
지정일
1994.07.04
소재지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산53-4번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반남박씨문중
설명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소(1493∼1534)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박소 선생은 학문에 뛰어난 이로, 중종 14년(1519)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의 부수찬, 사간원의 사간 등을 지냈고, 생을 마친 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선조 23년(1590)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를 새겨 비를 세웠다.400년이 흘렀지만 한석봉 그의 글씨는 생생히 살아 있었다.
박소(
1493(성종 24)∼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병문(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쓴 결과 식견이 더욱 넓어져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 : 강의나 강론하는 자리)에 나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해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다.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라고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그 뒤 정언(正言)·지평(持平)·사인(舍人)·필선(弼善)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사간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전한(典翰) 조종경(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해 도리어 사성(司成)에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번 탄핵해 그들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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