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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김우옹신도비 (東岡金宇顒神道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0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2. 12. 7. 18:35
동강김우옹신도비 (東岡金宇顒神道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0호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0호 명칭
동강김우옹신도비 (東岡金宇옹神道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91.05.14 소재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산32-1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김위 설명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우옹(1540∼1603)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김우옹은 조식의 제자로 들어가 성리학의 맥을 이어받았으며, 명종 22년(1567) 문과에 올라 직제학·대사간·병조·형조참판을 지내었다.『속강목』을 펴내고 많은 시를 지었으며, 생을 마친 후에는 이조판서에 올랐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갈암 이현일이 글을 짓고, 미수 허목이 글씨를 썼다.동강 김우옹(東岡金宇顒)1540(중종 35) 경북 성주~ 1603(선조 36) 충북 청주.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학문과 정치의 시책에 대해 진언하여 선조의 신임을 얻었다. 동인이면서도 서인인 이이를 두둔할 정도로 선학(先學)을 존경했다. 천군전류(天君傳類)의 가전체를 처음으로 썼다. 부인의 외할아버지인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67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지 못한다 하여 전적(典籍)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었고, 이조좌랑·사인·부응교 등을 지냈다. 1579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사양했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고, 대사성·대사간을 거쳐 부제학·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정여립과 함께 공부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병조판서를 지냈고, 명(明)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가 되었다. 그뒤 명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의 장수 이여송에게 전했다.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지냈다. 1599년 자리에서 물러나 인천에서 지내다 다음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천군전〉은 스승인 조식이 심성의 원리를 탐구하여 지은 〈신명사도 神明舍圖〉를 스승의 뜻에 따라 알기 쉽게 옮겨놓은 것이다. 심성(心性)의 본체를 천군이라 하고, 천군이 다스리는 마음의 나라가 해(懈)·오(傲) 등의 간신과 도둑의 무리들로 인해 타락하다가 경(敬)·의(義) 등의 충신들에 의해 올바른 질서를 되찾는 과정을 그렸다. 그러나 사건전개보다는 설명이 길고 사신(史臣)의 평이라는 것까지 붙어 있어 흥미가 떨어진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주의 봉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 문집이 간행되었고,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에 의해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동강집〉·〈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鋼目〉 등을 썼으며, 〈경연강의 經筵講義〉를 엮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인조 5)~ 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휘일(徽逸)과 함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주요한 인물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李珥)학파의 설을 비판했다.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아버지는 시명(時明)이며,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시하지 않았다. 1666년(현종 7) 영남유생의 대표로, 효종의 모후인 조대비의 복상(服喪)을 만 1년으로 하자고 주장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679년(숙종 5) 허목(許穆)의 천거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1689년에는 산림유현(山林儒賢)에게만 제수되는 사업(司業)·좨주(祭酒)를 지내고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으로 과거를 실시할 때 승보시(陞補試)·학제(學製)·도회(都會)·잡과(雜科) 등을 폐지하고 덕행·문예를 중심으로 한 정자학교(程子學校)의 제도와 공거제도(貢擧制度)를 따르는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조참판·찬선을 거쳐 병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추방되자 조사기(趙嗣基)를 신구(伸救)하다가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97년 광양으로 이배(移配)되었고, 전리방귀(田里放歸)의 명이 내린 뒤 안동의 금양(錦陽)에 집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선조 28)∼1682(숙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자(磁)의 증손으로, 별제 강(橿)의 손자이고, 현감 교(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옹01)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 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 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그의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 東事》·《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경설 經說》·《경례유찬 經禮類纂》·《미수기언 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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