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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대(水落臺)-명승이로다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14. 2. 28. 11:50
수락대(水落臺)-명승이로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포리 1208
수락대(水落臺)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 포2리 석관천변에 우뚝 서 있다. 영주에서 예천으로 가다가 감천 중·고등학교를 지나서 나일성천문대 못 미처 좌측으로 난 잘 포장된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그 지척(咫尺)에 수락대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류성룡이 고향을 왕래할 때 자연을 감상하며 쉬었던 곳으로서, 지역 사림(士林)에서 이를 추모하여 ‘서애 선생 장구지소(西厓 先生 杖屨之所)’라는 명문을 새겼고 1661(효종 11) 학사 김응조와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등 「선유록」에 등재 된 25현이 ‘선유계화’를 만들어 소요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유성룡류성룡(柳成龍 ; 1542∼1607)의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검열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감찰, 전적 등의 벼슬을 거치고 양관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도학과 문장과 덕행을 겸했다 하여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시호는 문충(文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김응조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 김응조(金應祖 ; 1587∼1667)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안동출신.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다. 17세 때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ㆍ흥덕현감(興德縣監)ㆍ선산부사(善山府使) 등을 역임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ㆍ공조참의(工曹參議)ㆍ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의 여러관직을 인조ㆍ효종ㆍ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홍여하 홍여하(洪汝河 ; 1621∼1678)의 자는 백원(百源), 호는 산택재(山澤齋), 혹은 목재(木齋),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대사간 호(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시 및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어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선행을 포상하는 등 한결같이 근본에 힘쓰는 정치를 행하였다. 1659년 3월에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疏文)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하는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 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화재 > 내가 본 기타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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