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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Byeokgolje Reservoir, Gimje-사적 제111호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4. 1. 14. 19:08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종목 사적 제111호 명칭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분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농업/ 관개시설 수량 187,473㎡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 시대 삼국시대 소유.관리 국유,사유,김제시 설명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최고의 고대 저수지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그러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고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제방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제방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김제벽골제비및제방 → 김제 벽골제)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수문 장생거
중수비
중수비(重修碑)에,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라 하니, 고적(古籍)에 적혀 있다.
6만 8백 43자=18.2529km? 1자 30cm 7만 7천 4백 6보=38.703km? 1보 50cm/46.4436km 1보 60cm
더 자세히 :
http://byeokgolje.gimje.go.kr/index.sko?menuCd=BC03001000000
https://youtu.be/P_9DaWaJAh8?t=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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