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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유령전첩지 (蟹踰嶺戰捷地)-경기도 기념물 제39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4. 1. 8. 12:38

    (蟹踰嶺戰捷地)-  제39

     -임진왜란 초 육상전투 최초 승리

     

    경기도기념물 제39호

    경기도기념물 제39호

     

    종목

    경기도기념물 제39호

    명칭

    해유령전첩지

    (蟹踰嶺戰捷地)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전적지/ 임란전적지         

    수량

    일원

    지정일

    1977.10.13

    소재지

    경기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38         

    시대

    기타

    소유.관리

    국유,양주시

    설명

    해유령 전첩지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육지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이다.

    당시 신각·이양원·이흔 장군의 합동작전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해유령에서 왜병 70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둬 조선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도성 남쪽 한강 방어선에서 왜군을 막지 못한 김명원은 자신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 책임을 신각 장군에게 뒤집어 씌워 장군은 처형되었다.

    1977년 국난극복의 전승을 기념하고 억울하게 죽은 신각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높이 10.6m의 비를 세웠다.

     

     

    경기도기념물 제39호

    경기도기념물 제39호

     

     

     해유령

     

     

     

     

     

     

     

     

     

     

     임진왜란 때 부원수 신각(申恪)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한 곳.
    경기도 기념물 제39호.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蓮谷里)에서 파주 광탄(廣灘)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부근의 지세는 연곡리의 입구가 좌우로 낮은 산이 마치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 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상으로 매우 주요한 지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한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신각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함경도병사 이혼(李渾)으로부터 지원병을 얻어 서울로부터 북상하는 왜군을 해유령 입구에서 적의 선봉 부대를 맞이하여 목 70여급(級)을 베어 큰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임진강으로 도망하였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한강 패전의 책임을 신각에게 미루고 명령불복종죄로 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우의정 유홍(兪泓)은 그 내용을 믿고 신각의 참형을 주창하여 양주에서 참살되었다.
    뒤늦게 승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형 집행을 중지하기 위하여 선전관을 파견하였으나 형 집행 후에 현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높이 10.6m의 화강암으로 된 사각 기둥의 전첩비를 세웠으며 기단(基壇)의 면적은 약 40평 정도이다. 또한 부근에 사당도 세워져 있다. 
     양주전투
    1592년(선조 25) 5월 2일, 서울을 향하여 쳐들어 오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한강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적에게 패퇴, 임진강 쪽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 부원수 신각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곡(山谷)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함경도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만나 그들과 합세하여 한성의 왜적 토벌을 논의하던 중 양주를 중심으로 한성에 출입하는 적의 활동이 매우 빈번하다는 정보를 확인한 뒤, 해유령(蟹踰嶺) 부근에 잠복하여 있다가 적의 귀로를 요격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5월 중순 어느날 저녁, 무질서한 행군으로 해유령을 넘어오던 일본군 1개 부대를 맞아 미리 매복중이던 조선군사들이 완전한 포위상태에서 적을 급습, 순식간에 70여명의 적병을 참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왜군이 부산상륙 이후 조선군사가 올린 최초의 큰 전과였으나 피난길에 오른 조정에서는 길이 막혀 그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이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가장 큰 공을 세운 부원수 신각한강 방어전에서 도원수의 명령에 불복하여 달아났다는 김명원의 그릇된 보고에 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그를 처형시켰다. 뒤에 김명원의 보고가 허위였음이 드러나고 양주전투에서 세운 신각의 공이 조정에 알려져 처형을 중지하고자 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그가 죽고난 뒤의 일이었다 한다.
    신각[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경안(景顔)이다. 작은아버지 경민(景閔)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초에 연안·영흥의 부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상좌수사, 1576년에 경상우병사를 역임하였다.
    1586년 강화부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방어사가 되었으나, 영흥부사 재직 시에 신창현감(新昌縣監) 조희맹(趙希孟)이 그의 첩에서 난 아들을 납속(納粟)시켜서라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관의 곡식을 꺼내 그 납속을 충당해주었다가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으며 서울 수비를 위하여 수성대장(守城大將) 이양원(李陽元) 휘하의 중위대장(中衛大將)에 임명되었고, 다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휘하의 부원수로서 한강을 지켰다.
    이 때 김명원은 임진에 가 있었으므로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고 함경도병마사 이혼(李渾)의 원군과 합세하여, 양주 해유령(蟹踰嶺)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결과 적의 머리 70급(級)을 베었는데 이것은 왜란 초기 처음 있는 승첩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이양원이 산골에 숨어 있어 소식이 끊겼는데, 그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도망쳤다는 내용의 장계(狀啓)가 올려져 당시 우의정 유홍(兪泓)에 의해 참형을 당하였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 다시 첩보가 도착하여 왕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무인이었으나 청렴, 근신했으므로 비명에 죽은 것을 모두 애석해하였다. 그의 처 정씨(鄭氏)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낸 뒤 자결했는데, 정조 때 열녀문이 세워졌다. 연안의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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