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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보물 제1804호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3. 9. 6. 10:55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보물 제1804호
보물 제1804호 보물 제1804호 종목
보물 제1804호 명칭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2013.07.16 소재지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내곡동 산13-1 시대
조선시재 소유.관리
국유,조선왕릉관리소 중부지구관리소 설명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獻陵神道碑)’는 1422년(세종 4년)에 세운 것이다.
태종 헌릉 신도비는 태조의 다섯 째 아들로 조선왕조 국기를 튼튼히 다졌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년)의 생애와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비문을 새겨 세운 것이다.
비문은 태종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변계량(卞季良)이 지었고, 전액(篆額)은 당대의 서예가 권홍(權弘, 1360~1446년)이 썼다. 다만 비문 글씨를 누가 썼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의 서예문화와 그 경향을 연구하는 데는 손색이 없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태종 헌릉 신도비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귀부(龜趺)는 손상되었지만 이수(螭V首)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 새롭게 명나라의 석비 전통을 받아들이는 비석의 이수양식을 연구하는데 기준작이 된다.보물 제1804호 보물 제1804호 변계량 ( 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주(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사 원(元)이고,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鸞)이다.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인이다.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對句)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85년 문과에 급제, 전교주부(典校注簿)·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郎將)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郎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태종 초에는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이 때 가뭄이 심해 상왕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렸다.그 뒤 태종 말까지 수문전제학·좌부빈객·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우빈객·예조판서·경연지사·춘추관지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419년에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 이종무(李從茂)를 앞세운 기해동정(己亥東征)을 성공케 하는 데 공헌하였다.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과거 시관으로 지극히 공정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려 말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화산별곡 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 ≪춘정집 春亭集≫ 3권 5책이 전한다.≪태조실록≫·≪국조보감 國朝寶鑑≫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했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찬하였다.그 외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만한 것을 모아 쓴 ≪정부상규설 政府相規說≫이 있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권홍 ( 1360(공민왕 9)∼1446(세종 2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간(幹), 자는 백도(伯道), 호는 쌍당(雙塘)·송설헌(松雪軒). 아버지는 참찬문하부사 균(鈞)이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보(溥)의 증손이다.1382년(우왕 8) 과거에 급제, 춘추관검열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전직한 뒤 사헌규정(司憲糾正)이 되었다.1388년 우정언(右正言)에 오르고 이조·병조의 좌랑을 지낸 뒤, 1391년(공양왕 3)에 우헌납(右獻納)으로 옮겼으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하다가 면직당하였다. 그로 인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 장류(杖流)에 처하여졌다.1400년(정종 2)에 좌보궐(左補闕)에 임명되고 사헌시사(司憲侍史)로 승진되었다가, 성균악정(成均樂正)으로 옮겨진 뒤 1402년(태종 2) 딸이 태종의 빈이 되자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1404년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를 거쳐, 1407년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갔고, 1410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2년 태조의 후손이 아니면서 재내제군(在內諸君)·원윤(元尹)·정윤(正尹)에 책봉되는 것과 외척으로 봉군되는 것을 혁파하는 정책으로 인해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로 고쳐 제수되었다.1413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1414년 판한성부사, 1417년 판돈녕부사, 1418년 예조판서를 지냈다. 1423년(세종 5)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곧 치사(致仕)하였다. 1432년 원묘(原廟)와 종학(宗學)에 비(碑)·갈(碣)을 세우고 태조 이하 역대 군왕을 찬미하자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1433년 유관(柳寬) 등과 함께 기영회(耆英會)를 조직하였다. 문학에 뛰어나고 전서·예서에 능해 헌릉(獻陵)·문묘(文廟)·기자사(箕子祠)의 비문을 썼다. 문집으로 『쌍당집』이 전하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문화재 > 내가 본 보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