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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 정려각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13. 8. 8. 20:24
하동정씨 정려각
하동정씨 정려각 정득열(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충신.1589년(선조 22)에 비변사에서 무신들을 불차녹용(不次錄用)할 때 관찰사 강섬(姜暹)의 천거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천현감으로 왜적 1만여명이 세 길로 나누어 진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의 선봉이 되었다.유숭인이 전쟁에 패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지키기를 원하였으나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받아들이지 않고 밖에서 응원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응원하기 위하여 성에서 돌아 나오다 적을 만나 접전, 유숭인이 먼저 전사하고 그도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1739년(영조 15)에 유학 유상화(柳相華) 등 수백명이 그를 임진왜란 때 역전사(力戰死)한 공로자로, 그의 아들 택뢰(澤雷)도 광해군 때 폐모론을 공박한 공로자로 증관사시(贈官賜諡)할 것을 상소하여 그는 훈련정에, 아들 택뢰는 지평에 증직되었다.정택뢰( 1585(선조 18)∼1619(광해군 11). 조선 후기의 지사(志士).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岡). 영의정 인지(麟趾)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득열(得說)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종경(宗慶)의 딸이다.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5년 이이첨(李爾瞻)이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을 사주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제기하자,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이원익(李元翼)이 그 부당성을 극력 논박하다가 유배당하였다.이에 대하여 유생 홍무적(洪茂績)·김효성(金孝誠) 등과 더불어 이른바 논척조인(論斥造訒)의 상소를 올려 이원익을 변호하고, 이이첨 일파를 치죄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이로 인하여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었으며, 어머니 강씨(姜氏)가 함께 배소에 기거하다가 1616년에 죽자 애통 끝에 실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지평, 순조조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결(忠潔)이다.정천세 아들 천세는 11살에 아버지를 여위자 밤낮으로 슬퍼하다가 열흘이 못되어 죽었다. 이에 1806년(순조 6)에 효로서 함께 명정하였다. 정택뢰부인 동래정씨 정택뢰의 부인 동래정씨는 남편이 죽자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상을 마친 후 죽어 순조가 열(烈)로서 명정하였다. '문화재 > 내가 본 기타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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