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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산 맹씨 행단 (牙山 孟氏 杏壇)-사적 제109호
    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3. 7. 31. 17:59

    아산 맹씨 행단 (牙山 孟氏 杏壇)-사적  제109호

     

      사적 제109호             사적 제109호  
     

     

     

    종목

    사적 제109호

    명칭

    아산 맹씨 행단 (牙山 孟氏 杏壇)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제사유적/ 제사터

    수량

    7,856㎡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사유,아산시

    설명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맹사성은 고려말 · 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ㄷ자형 맞배집으로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집의 마당에는 600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 ·전나무·감나무 들이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의 개울가에도 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담장 안 마당에는 채소밭도 만들어져 있다.

    이 집을 통해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사적 제109호             사적 제109호  

     

     

     

     

     

     

     

     

     

     

     

     

     

     

     

     

     

     

     

     

     

     

     

     

     

     

     

     

     

     

     

     

     

     

     

     

     

     

     

     

     

     

     

     

     

     

     

     

     

     

     

     

     

    맹사성(孟思誠,

    1360년

     

    음력 7월 17일

    ~

    1438년

     

    음력 10월 4일

    )

     

    맹사성(孟思誠)은

    고려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본관은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명장인

    최영

    의 손녀 사위였다.

    황희

    ,

    윤회

    ,

    권진

    과 함께

    세종

    대의 재상이자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생애 초반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명장인

    최영

    의 손녀 사위였다. 맹사성은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됐다.

    1386년

    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92년

     

    이성계

    고려

    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 출사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라는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

    에 출사한다. 그는 자신의 처조부인

    최영

    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다. 1408년에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정치 활동

    1408년

    맹사성은

    사헌부

    의 수장인

    대사헌

    으로 있으면서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태종

    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부마인

    조대림

    을 고문했다.[1]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과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된다. 당시

    영의정

    이던

    성석린

    황희

    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1]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1418년

    세종 즉위 후

    공조판서

    가 되었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찬성사를 지냈다.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황희

    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

    을 정리하기도 했다. '태종 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2]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

    강호사시가

    가 있다 .

    세종대왕

    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자

    성리학

    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

    유교

    국가임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세종대왕

    이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고

    태종

    때 억울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자, 그는 세종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오히려 직접

    집현전

    학사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불교 귀의를 반대하였다.그는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자식에 절하기로 술버릇 가르쳤다.[모호한 표현] 또한

    김종서

    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

    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냈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예악의 정비

    조선시대 유교정치에 있어서 예악, 즉 예의와 음악은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었다. 공자는 자신의 삶을 도덕에 근거하고 인애에 의지하며 예술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라고 했다. 예악은 유교적 삶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계였다. 그러기에 법치보다는 예치를 추구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정치를 지향한 것이었다.세종 때 예악의 정비가 우의정 맹사성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박연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전통 음악을 버리고 중국 음악 중심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맹사성은 전통 음악과 중국 음악을 조화하고 융합하는 방향에서 음악을 정비했다.

    여진 정벌

    세종 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방 영토가 확정됐다.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요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복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했다.세종은 1433년 1만 5천명의 병력으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적 사망 170명, 포로 36명, 우마 170마리를 얻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0명에 불과한 대승리였다.이 때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권진과는 달리 세종의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했다. 정벌 시기, 군사 규모,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 조직, 7개 부대에 의한 동시다발적 기습 작전 등은 모두 맹사성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정벌 후 맹사성은 모든 공을 최윤덕에게로 돌려 그를 좌의정에 승진시켜 줄 것을 건의했다. 그는 좌의정 직을 사임할 각오까지 했지만, 세종은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세종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여진족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맹사성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다.

    온양 온천

    세종은 격무로 인해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어 온양으로 내려와 온천욕으로 질병을 치료했다. 이 기념으로 ‘온양’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그런데 세종은 온천 치료의 혜택이 백성에게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백성을 위한 온천탕을 만들고 백성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이러한 세종의 뜻에 대해 맹사성은 즉시 찬성하여 시행되도록 했다. 온양에 살았던 맹사성은 온천치료의 효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사성은 세종이 조선의 온천 복지 정책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최후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나 한미한 사람이 방문해도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서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 주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 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http://ko.wikipedia.org/wiki/

    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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