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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앞 獅子 石燈)-보물 제656호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3. 7. 22. 18:13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앞 獅子 石燈)-보물 제656호
보물 제656호 보물 제656호 종목
보물 제656호 명칭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앞 獅子 石燈)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수량
1 기 지정일
1979.05.22 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충주시 설명
청룡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뚜렷하게 알 수 없고, 현재 절의 옛모습을 짐작해 볼 방법이 없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서 있을 뿐이며,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다.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보물 제656호 보물 제656호 일연스님 보각국사
1214년(고종 1)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1227년(고종 14)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고,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의 법계(法界)를 받았다.1249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 받았다.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1274년 그가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다.1289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저서로는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입적하던 해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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