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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Cultural Heritage-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34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7. 5. 00:13
World Cultural Heritage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34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11th King Jungjong's second wife Queen Janggyeong-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제11대 중종(재위1506~1544)의 계비 장경왕후(1491~1515) 윤씨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여주 영릉(驪州 英陵)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1397(태조 6)∼1450(세종32). 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다.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효령(孝寧)·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擇賢 :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의 명분을 주어 그를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장릉(莊陵)단종비사릉(思陵) 이홍위 1452~1455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집현전직제학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으로1457년 6월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이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1450(세종 32)∼1469(예종 1). 조선 제8대 왕.재위 1468∼146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황(晄)이다. 자는 명조(明照)이며, 초자(初字)는 평보(平甫)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파평부원군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章順王后)이다. 계비는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처음에는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19세에 수강궁(壽康宮)에서 즉위하였으며, 재위 1년 2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즉위 초에는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삼아, 이들이 서무를 의결하게 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였다. 이 해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 사형당하였다.1469년 3월 삼포(三浦)에서 왜(倭)와의 사무역을 금지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각 도, 각 읍에 있는 둔전(屯田)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이해 6월에 「천하도(天下圖)」가 완성되었다. 7월에는 『무정보감(武定寶鑑)』이 이룩되었다. 9월에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예종은 세자로 있을 때인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치 경험이 있고 세조의 정치방법에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세조처럼 언관(言官)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여 언관에 대한 좌천·파직 등의 기사를 볼 수 있다.재위기간이 약 14개월에 불과하여 이 시기는 세조시대에서 성종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시대의 성격을 띤다. 시호는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다. 묘호는 예종(睿宗)이다. 능호는 창릉(昌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중종의 계비고양 서삼릉 희릉 이역 1506~1544 1488(성종 19)∼1544(중종 39).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역(懌)이다.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윤씨(尹氏)이다.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년 9월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 : 학문을 일으키고자 유능한 젊은 관료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한 제도)·전경(專經) 등을 엄중히 시행하였다.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특히 1515년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해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道學)에 근거한 철인군주정치(哲人君主政治)를 표방해 기성 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려 하였다.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친히 김식(金湜) 등 유능한 신진 사류 28명을 뽑아 언론·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해, 이른바 이들 사림파(士林派)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반정공신(反正功臣)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를 계기로, 1519년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해 나라를 뒤집어놓았다고 주장해 기묘사화를 일으켰다.이를 계기로 신진 사림세력이 숙청됨으로써 개혁정치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대에는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고 각종 옥사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 심정·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 정계에 복귀한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파직되었다.이듬 해 3월에는 윤세창(尹世昌) 등의 모역사건이 일어났다.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심정·유자광(柳子光)을 제거하려고 일으킨 동궁의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경빈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이 쫓겨나 원사(怨死)하였다. 이렇게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하게 벌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1531년 그 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자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립해 중종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 형제가 등장해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해 김안로가 추방되었다. 이러한 척신의 대두는 마침내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의 전주를 이루기도 하였다.이처럼 중종대에는 정치적으로 조선 전기사회가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각종 모순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훈구세력과 신진 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 내의 갈등 및 훈구세력과 척신세력 간의 세력다툼 등이 일어났다.이러한 정국 불안은 국방정책에도 많은 혼란을 가져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1510년 4월 삼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이들은 한때 제포(薺浦)와 부산포(富山浦)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 등을 공격해 경상도 해안 일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다.일본의 아시카가(足利) 막부의 간청으로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였다.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를 반감하였다. 또한 항거왜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엄격한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왜변(倭變)이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 추자도(楸子島) 왜변과 동래염장(東萊鹽場)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 왜변이 대표적이다.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해 인마(人馬)를 약탈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한편, 북방 국경지대에서는 야인(野人)들의 침탈이 잦아졌다. 1512년는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야인들이 침입해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4군(四郡)지대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六鎭)지대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였다.또한 의주산성(義州山城)을 수축해 북방 방어에 노력하였다.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적극적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야인들은 생활 여건이 나은 6진·4군지대로 침입해 때로는 만포첨사(滿浦僉使)가 피살되는 등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이처럼 남왜북로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자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고,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였다. 비변사는 변방에 외침이 있을 때,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들이 모여 방어를 의논하던 임시 합좌회의기관이었다. 그러나 뒤에 영설(永設) 합좌기관으로 발전해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으로서 성격이 바뀌어 갔다.이 밖에도 한때 무학(武學)을 설치하고, 편조전(鞭條箭)·벽력포(霹靂砲) 등을 제작해 외침에 대비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과 함께 군사 질서가 허물어져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이 행해지는 등 조선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모순들이 노출되었다.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 도덕윤리가 정착되어 갔다. 조광조 등을 등용한 초기에는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였다. 또한 도성 안의 요승(妖僧)·무가(巫家)를 적발해 처치하고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향약을 전국에 설치하였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일시 주춤했으나, 그 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이륜행실 二倫行實≫·≪속삼강행실 續三綱行實≫ 등을 간행해 국민 교화에 힘썼다. 중종 말년에는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고,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한 영은문(迎恩門)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를 정착시켜 나갔다.오랜 재위 기간 동안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해 많은 구리활자를 주조해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이 편찬, 간행되었다.즉, 최세진(崔世珍)·신용개(申用漑)·이행(李荇)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四聲通解≫·≪속동문선 續東文選≫·≪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다. 1536년에는 찬집청(撰輯廳)을 설치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고, 역사·지리·언어·문학·사회의 각 방면의 문헌들을 편찬, 간행하였다.≪경국대전≫·≪대전속록≫ 등을 간행하였다. 1540년에는 역대의 실록을 등사해 사고(史庫)에 배치하였다. 또한 1542년 근정청(斤正廳)을 설치해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이듬 해 7월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을 완성, 반포해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였다.경제면에서는 저화(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였다. 1522년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해 악포의 유통을 막고, 두승(斗升)을 새로 만들어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한편, 1524년에는 전라도·강원도·평안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의복·음식·혼인 등에 대한 사치를 금지했으며, 관리들이 신래자(新來者)를 포악하게 다루는 것을 금지하는 등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과 잦은 외침 등으로 실효를 크게 거둘 수가 없었다.특기할 만한 사실은 1530년 4월 당시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상의원(尙衣院)이 무역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는 지배층의 의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도 발달하였다. 즉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간의혼상(簡儀渾象)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였다.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해 이두석(泥豆錫)·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배워 오게 하였다. 1536년에는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해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또한 1538년에는 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해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였다. 시호는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는 중종(中宗)이다. 능호는 정릉(靖陵)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은 왕과 문정왕후에게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이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 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19대 숙종 이순 1674~1720 1661(현종 2)∼1720(숙종 46). 조선 제19대 왕.재위 1674∼172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비(妃)는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이며, 제2계비는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己巳換局)(甲戌換局) 연속적인 변화가 있었다.노론·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 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춰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났다.대동법(大同法)을 완성하였다.양전사업(量田事業)을 사실상 종결하였다.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하였다.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다.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왕권 강화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붕당정치 하에 견제 받고 손상되었던 왕권의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였다.특히 양역변통 문제에 대한 해결 시도에서 나타나듯 민생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민폐의 제거와 민생 안정책의 시행에 주력하였다.전체적인 면에서, 임진왜란 이후 동요된 사회에 대한 수습과 재정비 과정을 일단 마무리지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영조의 원비릉-서오릉 홍릉 이금 1724~1776 1694(숙종 20)∼1776(영조 52). 조선 제21대 왕.재위 1725∼1776. 성은 이씨. 이름은 금(衿),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그를 보좌하는 동궁요속(東宮僚屬)이던 김동필(金東弼)·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박문수(朴文秀)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세제의 자리를 지켜 1724년 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그래서 즉위 직후 소론인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으로 영·좌의정을 삼고, 세제 책봉시 격렬하게 반대했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면서 한편으로는 앞서 임인삼수옥 당시 자신을 모해하고 죄인으로 몰려고 했던 김일경 등 소론과격파(急少)와 삼수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하였다.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형살(刑殺)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하였다. 그리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均役法)이었다. 단순한 감필(減疋)이 아니라 모두 1필역(一疋役)으로 부담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그리고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結錢)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이 위주인 지주층의 부담을 끌어내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피역자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한 것이나, 어염세·은여결세 등 그 동안 국가세입에 들지 않던 세금을 국고로 환수하게 한 데서 보듯이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가 얽힌 양역문제 해결에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한 것은, 1750년 친히 홍화문(弘化門)에 나가서 한성 시민을 만나서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의지를 보인 것과 함께 균역법이 갖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군비와 관련해서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며 1729년에는 숙종 때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고치게 하고, 이듬해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鳥銃)을 만들게 하여 군기(軍器)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1733년에는 평양중성(平壤中城)을 구축하게 하며,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수명(修明)시킴과 동시에 여성을 위한 ≪여사서 女四書≫를 언역(諺譯)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70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며,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영주(英主)였다.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홍릉(洪陵) 이희(이명복) 1863~1907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852년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에서 출생하였다.즉위 후인 1866년 9월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그러나 고종은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으로 국정을 총람, 대신 섭정하게 하였다. 그 뒤 고종은 장성하게 되면서 직접 통치를 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지게 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다스린다는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권한을 환수하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였다.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등의 항구를 개항하여 개화 문명을 수용하였다.일본 공사(日本公使 : 三浦梧樓)는 친일 정객과 모의하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하였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하고, 비로소 홍릉(洪陵)에 국장되었다(1919년 金谷陵으로 옮김).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군사적 압력 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1차 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저서로는 『주연집(珠淵集)』이 있다.능은 홍릉(洪陵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이다.27대 순종유릉(裕陵) 이청 1907~1910 1874(고종 11)∼1926. 조선 제27대 왕.재위 1907~1910.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74년 2월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다.탄생 다음 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에 민씨(뒷날의 純明孝皇后)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새로이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다.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송병준(宋秉唆)·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매국정객과 일본의 야합으로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는 경국(傾國)의 비사(悲史)와 민족사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저항의 통사(痛史)의 시기였다.한국 군대를 재정 부족이라는 구실로 강제해산시켜 우리 겨레의 손에서 총·칼의 자위조직마저 해체해 버렸다. 또한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 버렸다.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켰다. 침략의도에 부화뇌동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송병준·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조선인의 원(願)에 의하여 조선을 합병한다는 미명 하에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었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4월 25일에 승하하였다. 6월에 국장을 치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해 6·10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추존왕 덕종 이 장 1438(세종 20)∼1457(세조 3) 1438(세종 20)∼1457(세조 3). 조선 전기의 종실.초명은 숭(崇), 이름은 장(暲).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명(原明). 아버지가 세조이며, 어머니는 참판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성종의 아버지이다.1445년(세종 27)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1455년(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를 비로 맞아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읽기를 즐겼으며 해서(楷書)에도 능하였으나, 병약하였다고 한다.1457년 병이 크게 들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慶會樓)에 공작재(孔雀齋)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의정부 당상관, 육조판서와 좌찬성 신숙주(申叔舟), 도승지 한명회(韓明澮) 등도 함께 참여하여 속한 쾌유를 기원하였다고 한다.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20세의 나이로 죽었다.능은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에 있다. 1471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의경(懿敬)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사적 제200호 사적 제200호
종목 사적 제200호 명칭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248,763㎡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서오릉관리소 설명
서삼릉(西三陵)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6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으나 1870(고종 7)에는 소경원(昭慶園)으로 개호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엔 덕수 장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릉 3원 1묘 및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 54기의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서삼릉 → 고양 서삼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사적 제200호 사적 제200호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희릉(禧陵)-사적 제200호 능침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다시 찾아야 할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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