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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4. 14. 17:39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종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명칭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1 기

    지정일

    2001.09.27

    소재지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송광사

    시대

    고려시대

    소유.관리

    송광사

    설명

    송광사 설법전 오른쪽, 지금의 관음전 뒷뜰 언덕에 있는 불일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감로탑이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감로탑은 맨 아래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놓고 그 위로 네귀퉁이에 각을 이룬 또 다른 대좌를 끼워 넣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매우 특이한 형식이다. 맨 아래 2단의 정사각형 대좌는 그 위에 있는 돌들과 석질이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위에는 희미하게 연꽃무늬를 새긴 복련석이 몸돌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감로탑은 보조국사가 고려 희종 6년(1210)에 열반하자 왕으로부터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와 ‘감로탑’이라는 탑호를 받았으나, 3년 뒤인 강종 2년(1213)에 세워졌다. 그 동안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졌으나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 있다. 맨 아래 바닥돌을 제외하고 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지붕돌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의 모습은 고려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 (1158∼1210)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보조국사 지눌 (知訥. 1158∼1210)

    ◆ 2001년 5월의 문화인물, 보조국사 지눌.

    고려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 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 자(牧牛子). 황해도 서흥(瑞興)출신.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 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趙)씨이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불 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 뒤 병이 깨끗이 나았으므로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꾸 준한 구도 끝에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전남 청량사(淸凉 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 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 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 i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3년동안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 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 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 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 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 할 것인가."하며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원 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또한, 그는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 당나 라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 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마치 원수처럼 등을 지고있던 종래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결사 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 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하였 다. 이 정과 혜의 두가지는 일심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 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 한 채 시비를 일삼고 적을 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 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불교에로의 복귀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 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 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세번 치고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권수 정혜결사문> 1권, <직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 文)> 1권, <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 3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등이 있다. 입적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 (甘露)이다.

    보조국사 지눌 (知訥. 1158∼1210)

    2001년 5월의 문화인물, 보조국사 지눌.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독자적인 불교사상을 확립하고, 선종과 교종의 합일에 힘쓴 조계종의 중흥조(中興祖) 인물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중국 불교에서 한국인의 근기(根基)에 맞게 독자적으로 한국 불교사상의 체계를 세워 대각국사 태고국사와 더불어 가장 빛나는 업적을 쌓고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보조국사는 고려 불교가 귀족주의로 흐르자 모든 안락을 버리고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하면서 조계산 송광사에서 철저한 수행과 수도를 통해 평등포교를 강조했고, 고려 불교를 바로 세우는 데 전력했다.

    이후 부처님과 역대 조사의 참뜻을 근본으로 돌이켜 수행과 이생(利生)에 전념할 혁신적인 이념체계를 창안해 냈고, 새로운 기치를 세워 한국 불교를 조계종이라는 큰 강으로 합류시켰다.

    독자적인 사상과 품격을 갖춘 독특한 선교융통을 이뤄낸 보조국사의 선 사상의 핵심은 심성론, 돈오점수론, 간화론이며 세수 53세(희종 6년.1210)로 열반하기까지 '진심직설'(眞心直說) 등 15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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