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지증대사탑비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국보, 경상북도 문경시 가온읍 원북리 485 이 비(碑)는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智證大師)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신라 경애왕(景哀王) 원년(924)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신라 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석혜강(釋慧江)이 썼다. 용 모양의 비머리(螭首)와 귀부(龜趺)를 완전히 갖춘 비석으로 귀두는 용두형화(龍頭形化) 되었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으로 널리 알려진 비이다. 지증대사는 속성이 김씨(金氏)이고 호는 도헌(道憲)이다. 신라 헌덕왕(憲德王)16년(824)에 출생하여 17세에 부석사(浮石寺)로 출가하면서 승려가 되었다. 그가 헌강왕 8년(882)에 봉암사에서 향년 59세로 돌아가자 나라에서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고 탑호를 적조(寂照)라 하는 동시에 탑비(塔碑)를 세우도록 하였다.
문화재 설명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