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진주 의기사 (義妓祠)의기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3. 4. 2. 20:08

    진주 의기사 (義妓祠)-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의기사 (義妓祠)              의기사 (義妓祠)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명칭

    진주 의기사 (義妓祠)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

    1 동

    지정일

    1983.07.20

    소재지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진주시

    설명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의기사 (義妓祠)               의기사 (義妓祠)  

     

       의기사 (義妓祠)  
     

     

     

     

     
       의기사 (義妓祠)  

     

     

     

     

     

     

     

     

     

     

     

     

     

     

    의기정포(義妓旌褒)

    7) ‘청증직소(請贈職疏)’17)
    또한 신(臣)이 일찍이 열람(閱覽)해 보았는데, 류몽인은 문장가(文章家)로 이름난 사람인데다 ≪어우야담(於于野談)≫ 가운데에 논개(論介)의 순국(殉國) 사실(事實)을 매우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신(臣)은 언제나 이 대목을 읽을

    때면 책을 덮고 그녀의 이적(異蹟)을 감탄(感歎)해 마지 않았는데 우병사(右兵使)로 진주(晋州)에 부임(赴任)한 뒤에야 과연 촉석루 아래 남강 위의 초석(礎石)에 ‘의암(義巖)’이란 두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이 고노(古老)에게 물었더니 그 바위가 곧 논개의 살신(殺身) 섬적(殲賊)한 곳이었고 그 곳의 전설(傳說)도 자못 옛 기록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신은 그 바위를 보고 그 전설을 돌이켜보면서 의담(義膽)이 스스로 격동(激動)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 난중(亂中)에 절개(節慨)를 굽히고 몸을 판 사람의 수가 수없이 많았는데 그 누구인들 일개 창기(娼妓)로서 사군자(士君子)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리라고 여겼겠습니까? 옛날 설인과(薛仁果)의 항장(降將) 방선지(旁仙地)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선지에게 약취(掠取) 당해 있던 왕씨(王氏)란 여인이 그 자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그의 목을 찌르자 천자(天子)가 그녀를 숭의부인(崇義夫人)에 봉(封)했는데 오직 이 논개의 나라를 위해 왜적을 제거한 의열(義烈)이 어찌 왕씨녀보다 뒤진다고 할 수가 있으리오?
    아! 야담(野談)18)에는 아름다운 이름이 분명하게 실려 있고 이끼 낀 바위에는 ‘의(義)’자가 삭아 없어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도 유독 그녀의 아름다운 일에 대한 정표(情表)함이 없으니 이는 천신(天神)만이 탄식(歎息)하고 애석(哀惜)해하는 바가 아니라 실로 영남(嶺南)의 사민(士民)들 모두가 탄식하고 있는 바입니다. 신은 어리석고 미천한데다가 직위(職位)가 낮고 말에 무게가 없어서 전일(前日, 경종 년간)에 두 번이나 계청(啓請)하였지만 모두 실행되지 못하였습니다. 또다시 전하(殿下)를 번거롭고 어지럽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의 소관(所關) 업무(業務)도 복잡하고 군사(軍士)를 휼양(恤養)하여야 하고 기민(饑民)을 진구(賑救)할 방도(方道)에도 겨를이 없사옵니다. 실로 이러한 일이야 당장에 급한 일도 아니고 신의 직분에 관계되는 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오히려 외월(猥越)19)됨을 피치 않고 망령(妄靈)되이 논함은 저 제신들과 한 기생(妓生)이 순국한 후 원한(怨恨)을 품고 있는데도 이미 자손들의 애소(哀訴)함이 없어서 끝내는 전하께서 보고 듣지 못하도록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감히 사리(事理)를 분별(分別)하지 않고 진청(陳請)하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이 못났다고 하여 신의 말까지 폐하지 마시고 특별히 21명의 신하에게 골고루 증직(贈職)의 특전을 베푸시고 관기 논개에게도 정표하는 상장을 내리시어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且臣嘗閱柳夢寅所著野談一冊 有曰 論介者晋州官妓也. 當萬曆癸巳之歲 金千鎰倡義之師 入據晋州以抗倭 及城陷軍散人民俱死 而論介凝粧靚復 立於矗石下峭巖之前其下萬丈直入波心 群倭見而悅之 皆莫敢近 而獨一倭挺然直進 論介笑而迎之 遂抱其倭 直投于潭 彼官妓 淫娼也. 而視死如歸 不汚於賊 渠亦聖化中一物 不忍背國從賊 無他忠而已 猗歟哀哉云. 夢寅以文章名 爲此傳頗詳密 臣每讀至此 未嘗不掩卷而嗟異之及到晋營 矗石之下南江之上 果有哨石 而義巖二字大刻其上 臣訪於古老 則乃是論介投身殲賊之處 而其所傳說 頗與古記無異 臣見其巖而聞其說 不覺義膽之自激也. 噫 當時之亂 屈節賣身者 不知幾何人哉. 而孰謂一娼妓能辦士君子所難乎昔者薛人 杲之降將旁仙地之復叛也. 有王氏女取仙地所佩刀 因刺仙地而斃之 詔封崇義夫人 以旌其義夫論介之所成就 詎下於王氏之後哉. 嗚呼! 野記一篇芳名昭載 蒼巖半面義子不爛而泯沒至今 獨無旌義 此不但賤臣之所歎惜 實是南士之共咨嗟者也. 如臣愚賤 地卑言徵 前日再啓 俱未得行 則事不當更爲煩瀆 而且臣所管事務蝟劇 凡於恤軍賑飢之方 尙未自遑 則誠知此等事 不急於目前非關於分內 而猶且不避猥越 妄者論列者 哀彼諸臣一妓之取義抱寃 而旣無子孫之呼번(?) 終絶天聽之登澈 故不容泯默而止. 玆敢冒昧而陳伏願殿下 勿以人廢言 特於二十一諸臣 均施贈職之典 官妓論介 亦加旌表之章 用慰抑鬱之魂以爲激勸之方 不勝幸甚 臣無任激切析懇屛營之至 謹昧死以聞

    8) 영조(英祖)의 비답(批答)
    경(卿)이 상소(上疏)로써 위로 보낸 것에 관한 것이다. (그) 소장(疏章)들을 모두 갖추어 살펴 보았더니 당초의 것과 구별이 되니 반드시 까닭이 많을 것이다. 의암이란 것이 비록 있기는 하지만 야담(野談)의 기록을 어떻게 신빙(信憑) 할 수 있을 것이며, 더욱이 백여년전의 일을 가볍게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경이 충렬(忠烈)을 포상코자 하는 뜻은 가상(嘉尙)하지만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유지(有旨)하였노라.



    卿以上疏相送矣 省疏具悉 當初區別 必有委折. 義巖雖存 野談所記 何可憑信. 且百餘年之事 似難輕擧 而卿之慾 褒忠烈之意嘉矣. 其令廟堂稟處事有旨



    9) <충민창열양사조향절목(忠愍彰烈兩祠助享節目)>20)
    영조(英祖) 병신(丙申, 16년, 1740) 본영(本營) 남덕하(南德夏)가 또다시 21명의 신하(臣下)에 대한 증직(贈職)과 의기(義妓)의 정포(旌褒)를 계청(啓請)하여 마침내 윤허(允許)를 받게 되었다.



    英祖丙申 本營兵使南公德夏 又啓請二十一臣贈職及義妓旌褒之典 竟得蒙允.

    http://m.nongae.co.kr/gallery/view.php?code=pgallery&uid=179 

     

     

    논개 [論介]

    전북 장수 출신으로 성은 주씨(朱氏). 1593년(선조 26)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최경회·황진·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다.1721년(경종 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으며, 1739년(영조 15) 무렵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1868년(고종 5)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

     

     

     

     

     

     

     

     

     

    참고- 의암 : http://blog.daum.net/shinh-k791104/1425 

    참고-의암사적비 : http://blog.daum.net/shinh-k791104/142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