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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운서원 (紫雲書院)-경기도 기념물 제45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3. 19. 21:51

    자운서원 (紫雲書院)-경기도 기념물 제45호

     

    종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45호

    명칭

    자운서원 (紫雲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1 동

    지정일

    1973.07.10

    소재지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사유

    설명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율곡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루던 분으로 『격몽요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이 서원은 효종 1년(1650)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액서원으로 ‘자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인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 그 뒤 서원 터에서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대문 격인 자운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 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지내기에 적합하다. 사당 안쪽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에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배향인물

     

     

    1)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명종 3) 1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 상위종시설(人心道心 相違綜始說), 47세때는 선조임금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39(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현재 율곡전서 1,2권이 전해진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 상위종시설 人心道心 相爲終始說>을 선조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2),김장생(金長生)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호(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영(瑛)의 딸이다. 아들이 집(集)이다.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 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 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사련(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3),박세채(朴世采)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의(猗)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과 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649년(인조 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이이·성혼(成渾)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일찍이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고, 이이를 존경하였기에 그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자, 이에 분개하여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瀰),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었는데,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며 서인 측의 이론가로서 활약하였다. 당시 그가 지은 『복제사의(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서한을 보내어 윤휴를 꾸짖은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 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 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에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였다. 또한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하여 추가한 『춘추보편(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을 저술하였다.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정권교체로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해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끝내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소론계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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