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원(흥선대원왕) 興園(興宣大院王) 경기도 기념물 제48호 흥원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묘이다. 1863년 철종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후에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대전회통(大典會通)》 등 법전을 정비하고, 왕의 외척이 국가를 운영하던 정치기관인 비변사를 없앴다. 그리고 조선 시대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관인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였다. 또한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경복궁을 새로 고쳤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고 청을 제외한 일본 및 서양에 나라 문을 강력히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나라 간에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와 미군(신미양요, 1871년)을 격퇴하였고, 새로운 방식의 국교 관계를 체결하려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와의 권력 다툼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에 납치되어 4년간 갇혀있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있었으나 1908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하면서 흥원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1966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문화재 설명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무덤이다. 흥선대원군은 1907년에 흥선대원왕으로 추봉되었고 1908년에 무덤도 흥원(興園)으로 승격되었다. 묘역은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과 합장한 단분(單墳 ; 하나의 봉분)의 형태이다. 묘역의 석물들은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 재질이 우수하며 조각기법은 수려하고 섬세하여 뛰어난 예술성을 보인다. 이는 왕실에서 제작하였기 때문인데, 근대 조선 왕실의 희귀한 능묘 석물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봉분 주변에는 원(園)이라는 무덤의 격식에 맞추어 석양을 바깥쪽을 향하여 배치하였는데 1907년 이후에 위치를 변경한 것이다. 묘역 하단에는 장대한 장명등, 망주석과 문석인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장명등은 모란꽃 장식이 돋보이고, 망주석의 세호(細虎 ; 망주석 몸돌부분에 조각한 상서로운 동물 문양 장식)는 포도송이 같은 열매를 입에 물고 가는 형상이 독특하다. 문석인은 규모가 장대하고 안면표현이 섬세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성을 잘 구현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와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 표석(1905년)을 세웠다. 신도비는 1908년에 제작한 것으로 옥개귀부형(屋蓋龜趺形 ; 지붕모양의 머릿돌과 거북이 받침돌의 비석 형태)으로 제작하여 추존왕의 격식에 맞추었다. 신도비는 오석의 흑색 몸돌과 백색의 거북이 받침돌이 대조를 이루어 더욱 아름답다.
이 묘역은 조선 왕실 무덤의 마지막 계보를 잇고 있으며, 근대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석물을 보유한 곳으로 학술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