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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昌德宮 摛文院 測雨臺)-국보 제331호문화재/내가 본 국보 2021. 3. 20. 08:54
Rain Gauge Pedestal of Imunwon hall
분류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천문 수량 1점 지정(등록)일 2020.02.27 소재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로,국립고궁박물관) 시대 조선 정조 소유자 국유 관리자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昌德宮 摛文院 測雨臺)’는 1782년(정조 6) 정조의 명에 의해 창덕궁 규장각의 부속 건물인 이문원(摛文院) 앞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는 측우대 좌우 네 면에 새겨진 ‘측우기명(測雨器銘)’과 19세기 궁궐그림인 <동궐도(東闕圖)>를 통해 확인된다. <동궐도>에는 이문원 앞뜰에 받침돌 없이 놓인 것으로 그려진 측우대 한 기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이다.
석재는 조선시대 왕실유물에 많이 쓰인 대리석(당시는 대리암으로 불림)으로, 잘 다듬어 유려하게 새긴 글씨 또한 중앙의 장인이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문원 측우대는 1910년경까지 원래 자리에 있다가 이후 경성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을 거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측우대의 겉면에 새겨진 ‘측우기명’은 ?내각일력(內閣日曆)? 1782년 9월 14일 기사와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수록되어 있어 전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명문은 창덕궁 이문원에 측우기를 세우게 된 연원과 그 중요성에 대한 내용으로, 다음의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측우기는 세종 24년에 구리로 주조하였으며 높이 1자 5치(1척 5촌), 직경 7치라는 사실, 둘째, 1770년(영조 46)에 세종 대의 제도를 따라 측우기를 만들고, 창덕궁, 경희궁, 팔도(八道), 강화부, 개성부에 설치하였다는 사실, 셋째, 1782년(정조 6) 여름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후 비가 내렸고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명문을 통해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기우제를 통한 특별한 소망의 대상으로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세종 조에 시작한 조선 측우기 제도가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실증(實證)해주는 유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1442년(세종 24) 조선에서 농업에 활용하고자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조선 후기에도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로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함께 국보로 지정해 우리나라 전통과학의 우수성과 그 위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릴 가치가 충분하다.上之六年夏畿甸大旱圭
測雨器銘
測雨之有器 實昉於 世宗二十四年 鑄(範)銅爲之 高一尺五寸 圓徑七寸
置書雲觀及諸道郡縣 每雨尺其深以聞
先大王四十六年 得其舊制 鑄置昌德慶熙二宮及 八道兩都
其爲器雖小 兩聖朝憂勤水旱之政在焉 顧不重歟 上之六年夏畿甸大旱圭
[출처] 16. 규장각측우대에 새겨진 측우기명(測雨器銘)|작성자 한수당
유물설명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이다. 측우기의 받침대인 측우대의 표면에는 제작과 설치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1782년(정조 6) 정조가 가뭄이 극심하자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때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측우기의 제작 규정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측우기를 서운관(書雲觀)과 전국의 군현에 설치한 사실과 영조 때 창덕궁 · 경희궁과 전국에 설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의 측우기는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복제하여 올려놓은 것이다. 측우대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측우기는 실로 세종 24년(1432)에 시작되었다. 구리로 만들었다. 높이가 1자(尺) 5치(寸)이며 지름이 7치(寸)이다. 서운관(書雲觀)과 각 도의 고을에 두고 비올 때마다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였다. 영조 46년(1770)에 옛날 제도를 본떠서 창덕궁 · 경희궁 두 궁궐과 팔도와 한성부 · 개성부에 만들어 두었다. 그 그릇은 비록 작으나마 세종과 영조 두 성군께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다스리는 데 크게 힘쓰신 뜻이 있으니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영조 6년(1730)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가물어서 기우제를 여러 번 올렸으나 영험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성상께서 자기를 죄책하고 언로(言路)를 터놓으며 몸소 기우단[우단(雩壇)]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일산(日傘)을 물리치고 예복을 갖추고 저녁이 지나도록 한데서 지내며[노처(露處)] 제사를 올린 뒤에도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고 날이 샌 뒤에 옥문 밖에 대가(大駕)를 머무르고 사형수 이외의 경한 범죄는 모두 석방하였다. 이날 도성 안 선비와 부인들[사녀(士女)]이 우러러 보고 감격해 하였다. 우는 사람까지 있어서 하는 말이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서 이렇게도 애쓰시니 어찌 비가 오지 않을 것이며, 비가 비록 오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기꺼워하는 것은 비온 것과 같다’고 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과연 큰 비가 밤까지 내려서 1치(寸) 2푼(分)이나 내렸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성상께서 지성하심을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그래도 마음에 미흡한 것을 걱정하시고 내각에 분부하여 측우기를 이문원(摛文院) 뜰에 설치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비가 이미 흡족해서 신 염조(念祖)와 신 지검(志儉)에게 글을 쓰라 하시니 대개 기쁨을 기념하려 한 것이다. 신 등은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들이라 그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먼저 성상께서 백성을 위하여 걱정할 것을 알고 감히 그 걱정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비가 오고서는 꼭 먼저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기꺼워할 것을 알고 감히 그 기쁨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들의 걱정과 기쁨이 얽혀 있으니 신 등이 감히 공손하게 지키고 삼가 기다리지 않겠으랴. 그래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서 명(銘)을 한다.相此分寸 度彼方墺 분촌을 상상해서 저 전국 사정을 알 수 있다.少固慮旱 多亦傷澇 적으면 가물까 보아 염려하고 많으면 홍수에 상할세라.繼玆萬年 惟適是禱 이로부터 언제고 적당하기만 비노라.직제학 신 심염조(沈念祖)는 분부를 받아 글을 짓고 직제학 신 정지검(鄭志儉)은 분부를 받아 글씨를 씀.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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