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생가지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크게 물리친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태어난 곳이다. 사명대사는 부모가 죽자 열다섯에 직지사에서 출가하였으며 묘향산 보현사에서 서산대사 휴정(休政)의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산 유점사에서 승병을 모은 뒤 평안도 순안으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세해 외적과 싸웠다. 평양성 탈환 전투 등에서도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왜군 진영에 들어가 휴전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오는 등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사명대사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돌아갔고, 1610년 해인사에서 설법하던 중 입적했다. 그가 죽자 친분이 깊었던 허균(許筠)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사시(私諡)를 올렸다. 사시는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내리지 않을 때 제자나 지인이 죽은 이를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이다. 생가터에는 사랑채, 안채, 대문채가 복원돼 있다. *시호: 죽은 사람의 공덕을 기려 나라에서 내려주는 특별한 이름.
국가유산 설명
조선 중기 고승 사명당(1544∼1610)이 태어난 곳이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속명은 응규이며 호가 사명당이다. 중종 30년 풍천 임씨 집안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하여 직지사 신묵의 제자가 되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으며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광해군 2년(1610) 설법을 마치고 세상을 떴다. 저서로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사명당은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으며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동안 고라리 399번지와 400번지를 두고 어느 곳이 그의 생가터였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전문가들의 조사결과 399번지를 그의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399번지 일대의 지표조사 결과 기와 파편과 생활용품의 파편 등을 발견하였고, 건축물과 담장이 있었던 흔적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사명당의 어릴 때의 생활을 기록한 것을 참고하면 집 가까이에 연못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고라리 399번지로 추정하는데 그다지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명당이 이따금씩 고향으로 돌아올 때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고 그의 생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