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오방리 강동구 密陽 五方里 江東邱 경상남도 기념물 강동구江東邱는 평안도 도사를 지낸 조광익曺光益·1537~1578을 조문하려고 평안도 강동현江東縣 사람들이 가지고 온 흙으로 쌓은 작은 둔덕이다. ‘강동의 언덕’이란 뜻으로 오방리와 범평리 사이의 길 양쪽에 마주 보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인 1575년 경상도 도사都事* 최황이 조광익의 동생 조호익曺好益에게 군적軍籍에 올랐으면서도 병역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호익은 아버지 상喪을 이유로 거부했다가 강동현
강동현은 고려 1136년에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서경기 4도를 해체하고 강동(江東), 강서(江西), 중화(中和), 순화(順和), 삼등(三登), 삼화(三和)의 6개 현으로 분리할 때 잉을사향(仍乙舍鄕), 반석촌(班石村), 박달곶촌(朴達串村), 마탄촌(馬灘村)을 합쳐 강동현을 설립하였다. 그 뒤 성천에 편입되었다가 공양왕 때 다시 감무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35년(세종 17)에 고을 사람 곽만흥(郭萬興)이 현령이백선(李伯善)을 때리고 욕보였는데도 고을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고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여 삼등현에 편입시키고 치소를 삼등현 관아로 옮겼다(『세종실록』 17년 3월 10일). 이후 1451년(문종 1)에 삼등과 강동의 첫 글자를 따서 삼강현(三江縣)으로 하였다가 1482년에 다시 강동현으로 바꾸고 관아를 처음 있던 고을로 옮기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평양부 강동군이 되었다.
으로 유배됐다. 형 조광익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1578년 평안도 도사의 직책을 얻어 갔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그를 오방리에 장사할 때 형제의 우애에 감복한 강동의 선비와 백성들이 흙을 걸머지고 조문을 와 묘 위에 뿌리고 남은 흙으로 둔덕을 만들 었다고 한다. 선조 임금도 이들의 우애를 가상히 여겨《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싣도록 했다. 1834년 형제의 우애를 기리는 비각이 둔덕 옆에 세워졌다. 조광익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과 그를 모시는 오봉서원이 근처에 있다. * 도사: 조선시대에 관찰사를 보좌하던 관원.
국가유산 설명
오방리 동네밖 길가에 마련된 흙으로 쌓은 작은 언덕으로, 조광익(1537∼1578)의 효행과 아우 조호익(1545∼1609)과의 우애를 기리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조광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호는 취원당이다. 이황의 문인이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명종 13년(1558)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선조 11년(1578) 강동으로 유배된 아우 조호익을 만나려 평안도도사의 직책을 얻어 갔다가 42세 나이로 생을 마치었다. 밀양 오방리에서 장례를 치루었으나, 강동의 선비와 백성들이 강동의 흙을 가지고 천리길인 오방리까지 와서 무덤 위에 흙을 덮고 남은 것으로 조그마한 언덕을 만들어 대나무를 심었다. 후손들이 그 우애를 기념하여 ‘강동구’라 하였으며, 선조는 형제의 우애를 표창하고 『삼강행실도』에 그 수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