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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정사 (金臺精舍)-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7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4. 11. 11. 14:29
금대정사 (金臺精舍)-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종목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7호
명칭
금대정사 (金臺精舍)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1동 지정일
1993.02.25 소재지
경북 청송군 안덕면 속골길 16-3 (신성리) 시대
소유.관리
함안조씨 금대문중
설명
함안 조씨 16대손인 조지 선생의 큰아들인 수도, 다섯째 아들인 동도와 손자 함수와 함신 선생을 모시고 있는 재실이다.
건물은 조선 영조 12년(1736)에 지었고,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까치구멍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건물의 동쪽에는 안덕에 처음 들어와 자리를 잡은 조지와 조동도 부자를 위한 서원건물이 있었으나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없어지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만 남아있다. 또한 서쪽에는 지악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인조 2년(1624)에 지은 것으로 1962년에 넓히고 수리하였다.
이곳은 높은 지대 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안쪽 낮은 마당에는 동재·서재와 대문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화살나무가
조지(趙址, 1541~1599)
조지는 본관이 함안(咸安)이고 자가 극립(克立)이며 호가 망운(望雲)이다. 1541년 함안군(咸安郡) 낙계리(樂溪里)에서 출생하여 1599년 향년 58세로 서거하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여(趙旅)의 현손이자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내헌(耐軒) 조연(趙淵)의 손자이며,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조정언(趙庭彦)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 넓은 기개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1562년(명종 17) 조연의 명으로 청송군 안덕면에 이주하였다. 안덕면은 고향인 함안과 거리가 300여리나 되는 곳이었지만, 조지는 매년 3월마다 고향에 어른을 찾아뵈며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였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단 한 번 여막을 벗어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그때 함안군수로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도 매번 그를 찾아와 위로하고 효심을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의주(義州)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탄하며 출전할 뜻을 가졌으나, 이미 연로하여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아들 조형도(趙亨道)와 조동도(趙東道)를 곽재우(郭再祐)의 진영(陣營)에 보내면서 “국란을 당하여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것은 의(義)를 실천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온힘을 다하여 나라를 지키라”고 하였다.
또한 조지는 일찍부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김성일이 경상우도관찰사로 있을 때 편지를 주고 받으며 나랏일을 걱정하고 교분을 깊이 쌓았다. 이때 김성일은 조지를 “참으로 의인(義人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조지는 1568년(무진)에 처음 일록(日錄)을 기록하기 시작하여 1599년(기축)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 분량은 모두 36책(冊)으로, 국가대사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작은 일까지 세세히 기록하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수양하였다.
사후 자헌대부형조판서겸동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다.조수도(趙守道, 1565~1593)
조수도는 자가 경직(景直)이고 호가 신당(新堂)이다. 조지(趙址)와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품행이 단정하였고,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서 수학하였다. 김언기는 조수도의 총명함을 여러번 크게 칭찬하면서, “조수도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여 이미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매형인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가 예안(禮安)에 부임하였을 때는, 동생 조준도(趙遵道)와 함께 퇴계 이황을 사숙하며 공부하였다.
1581년 조지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상처에 피가 맺혀 큰 종기로 악화되었다. 상처에 백약도 아무 효과가 없자, 조수도는 밤에는 하늘에 기도하고 낮에는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지극한 효성으로 그 병을 치유하였다.
1588년(선조 21) 둘째 동생 조형도(趙亨道)와 함께 문경(聞慶)에 있던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를 방문하였다. 조종도는 그의 언사가 맑고 깨끗한 것을 보고는 “내헌(耐軒) 조연의 격조(格調)가 담겨 있으니, 우리 유가(儒家)의 시학(詩學)은 그대의 집에 있다.”고 칭찬하였다.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무고(誣告) 때문에 조종도가 옥에 갇히게 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감히 조종도를 위문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직 조수도만이 홀로 분개하여 친척 조언도(趙彦道)와 함께 금부(禁府)에 찾아가 조종도를 위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조지의 명을 받들어 두 아우 조형도와 조동도를 곽재우 장군의 휘하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는 맏아들로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나랏일에 충성을 다하고 가문의 절의를 빛내라.”라고 당부하였다. 그 해 7월 함안에 가서 집안 사람 14인을 모두 데리고 피난 가서 일가(一家)를 보전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사후 통훈대부사복시정(贈通訓大夫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조동도(趙東道, 1578~1668) 조동도(趙東道)는 자가 경망(景望)이고 호가 지악(芝嶽)으로 조지의 다섯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용모와 도량이 특출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한 번도 부형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관직에 올라 곡산훈도(谷山訓導)와 제용감부정(濟用監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해 둘째 형인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가 곽재우 의진(義陣)에 갈 때 분연히 말하기를 “큰형님(조수도)은 부모님을 모셔야 해서 하니, 형님이 가시는 데 이 아우 또한 마땅히 따라가겠다.”고 하고는 함께 종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15세에 불과했다.
1596년(선조 29)에 귀가하여 부모를 뵙고 마을에서 의병을 모으니, 사람들이 그를 청송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9월 9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서 32명의 장수들과 함께 시를 지었는데, 이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를 닦을 때는 경망(조동도의 자)에게 의지하라(修道倚景望)’는 글을 얻었을 만큼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동도는 향의장(鄕義將)이 되어 대구의장(大邱義將) 서재겸(徐再謙), 울산의장(蔚山義將) 윤홍명(尹弘鳴), 안동의장(安東義將) 유복기(柳復起), 밀양의장(密陽義將) 손기양(孫起陽), 영천의장(永川義將) 정세아(鄭世雅), 경주의장(慶州義將) 김응택(金應鐸) 등과 더불어 대구 팔공산(大邱八公山)에 모여 맹서(盟誓)하였다.
1599년 아버지 조지의 상을 당했을 때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 공훈자들을 포상할 때, 그는 “신하의 도리를 다했을 뿐인데, 무슨 공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면서 수상을 거절하였다.'문화재 > 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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