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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4. 16. 13:04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종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명칭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2011.12.20 소재지
전남 여수시 흥국사길 149(중흥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흥국사 설명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는 1703년(숙종 29)에 건립된 것이다. 비문을 지은 최창대는 당대의 명문장이었고, 비문을 쓴 이진휴 역시 숙종대에「통도사사리탑비」「선암사중수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92호)등 많은 작품을 남긴 명필이었다.
비문의 내용에는, 창건자 지눌과 무의자 담당(無衣子)와의 관계, 송광사가 세워진 직후 흥국사가 창건되었다는 사실, 1560년(명종 15) 법수회상(法守和尙)에 의해 사찰건물 1천여간이 증축되었다는 것, 1624년(인조 2) 계특(戒特)의 대대적인 사찰중건의 사실, 그리고 통일(通日)의 법당 개축사실 등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수비 뒷면에는 정동호(鄭東虎)가 지은 발문을 문세욱(文世郁)이 썼는데, 그 주요 내용은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즉, 보조국사가 흥국사를 창건한 이래 조선에 들어와 임진왜란을 겪으며 온갖 고충을 극복하며 약 470년 동안 중건한 승려들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바로 이어서 중건과정에서 협조한 김덕항(金德恒)을 비롯한 약 140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중건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그리고 석공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중수비의 건립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최창대(崔昌大)에 대하여
최창대(崔昌大)
1669(현종 10)∼1720(숙종 4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백(孝伯), 호는 곤륜(昆侖). 영의정 명길(鳴吉)의 증손으로, 영의정 석정(錫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경억(慶億)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설서·부수찬을 거쳐 1698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교리·이조좌랑·헌납·응교를 거쳐 1704년 사서(司書)·이조정랑을 지냈고, 1706년 사간 등을 지낸 뒤 1711년 대사성에 승진하였으며, 그뒤 이조참의·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박세채(朴世采)·김창협(金昌協)에 비교되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경서에 밝아 당시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암행어사로 있을 때 함경도 일대의 관폐를 엄명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또한 전라도에 어사로 나가서는 진소어(眞蘇魚)의 수세(收稅)에 따른 폐단과 각 고을 승려에게 부과하는 지공(紙貢)에 따른 폐단, 연해 제읍(諸邑)의 수령을 무신만으로 임명하는 데 따른 문제점 등에 대한 서계(書啓)를 올렸다.
저술도 많이 있으나 대부분 산일(散佚)되고, 《곤륜집》 20권 10책 만이 전하여지고 있다.이진휴(李震休)에 대하여
이진휴(李震休)
1657(효종 8)∼1710(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성암(省菴). 아버지는 영(泳)이며, 어머니는 정만화(鄭萬和)의 딸이다.
1677년(숙종 3)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6년에는 전적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지평·정언·장령·헌납·수찬·부교리·집의·사간·필선·승지 등을 역임하고, 1700년에 도승지·동지의금부사를 거쳐 1701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송사(訟事)를 편청(偏聽)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703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는데,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 2명을 죽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05년에 다시 도승지로 서용되었으며 그뒤 동지의금부사·안동부사·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특히 서예에 능하였으며, 그가 쓴 비문으로는 〈통도사사리탑비 通度寺舍利塔碑〉, 상주의 〈지추김식비 知樞金湜碑〉, 광주(廣州)의 〈예판이증비 禮判李增碑〉·〈찬성이상의비 贊成李尙毅碑〉, 양주의 〈호참목장흠비 戶參睦長欽碑〉·〈영백이명웅갈 嶺伯李命雄碣〉 등이 있다.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영취산흥국사중수사적비(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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