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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3대 문장가 전 홍유후 설총묘 (傳 弘儒侯 薛聰墓)-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3. 8. 16:35

     

    전 홍유후 설총묘 (傳弘儒侯薛聰墓)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

     

     

    종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

    명칭

    전홍유후설총묘 (傳弘儒侯薛聰墓)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

    3,409㎡

    지정일

    1999.03.11

    소재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423

    시대

     

    소유.관리

    경주·순창설씨대종회

    설명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인 설총의 묘이다.

    아버지는 원효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널리 능통하였다고 한다. 신라 유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후에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혔다.

    그가 이두를 창제했다고도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 때의『서동요』, 선덕여왕 때의『풍요』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설총은 6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였으며,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도 공헌하였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보문동 한복판 인가에 둘러 싸여 있는 묘에는 비문과 비석은 없으나, 예로부터 진평왕릉의 동쪽 보문리에 있다고 전해져 왔다. 최근에 그 앞에 상석이 하나 놓여졌으며 보존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홍유휴 설총

    1.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으로 불린다. 자는 총지(聰智).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태종무열왕 때인 654~66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천성이 명민(明敏)했으며 경사(經史)와 문학에 널리 통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 제6에는 설총이 신문왕의 요청으로 우화(花王戒 또는 諷王書라고 함)를 지어 들려준 기사가 나오는데, 이 우화는 국왕에게 아첨하는 여인의 애교보다 정직한 신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하는 내용으로, 통일신라의 전제정치하에서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이념을 주장한 것이다(→ 색인 : 〈화왕계〉). 설총은 6두품(六頭品) 출신으로서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총애와 신임을 얻음으로써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진출을 이루었다.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의 장인 경(卿)이 설치됨으로써 국학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식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설총은 이러한 국학의 설립과 교육에도 크게 공헌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구경(九經)을 우리말(方言)로 읽어 학생들에게 강론하여 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을 만들어 당시 중국 학문의 섭취에 도움을 주었다. 후세에 이르러, 특히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설총이 우리말로 경서를 읽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여 이를 이두(吏讀)의 창제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두로 쓴 기록이 이미 그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설총은 이때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리·집대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을 잘 지었다고 하나,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글자가 결락(缺落)된 비명(碑銘) 몇 점 외에는 전하지 않는다. 719년(성덕왕 18)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지었다.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었다.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경상남도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2. 11세기초 현종 13년(1021)에는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한국의 유종(儒宗)으로 일컬어졌다.

    설총의 석독구결은 경전에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또는 말음첨기(末音添記)를 나타내는 토를 붙여 그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는 방법을 표시한 것이다. 이 토는 향찰과 이두 등 모든 차자표기법에 응용되어 우리말 표기법의 원천이 되었다. 이 구결의 보급으로 인하여 향찰, 이두, 구결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들은 우리 선인들의 문자 생활을 매우 풍요롭게 하여 우리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설총은 화왕계(풍왕서)와 같은 최초의 가전체 문학작품을 써서 유학의 정신으로 왕도(王道)를 펼 것을 완곡하게 말하였고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에서는 유·불·선 삼교의 정신을 찬양하여 그의 학문의 폭이 넓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부친인 원효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는 효성을 보여 주기도 하는데 이는 설총이 관념적인 학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유학자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http://www.incheon.go.kr/icweb/program/board/detail.jsp?boardID=1421373&boardLines=10&boardTypeID=130&menuID=001001005004&searchSelect=BOARDTITLE

     

    화왕계 [花王戒]

     

    신라 때 문신 설총(薛聰:660경~730경)이 지은 우언(寓言).

     

    〈풍왕서 諷王書〉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설총을 다루면서 소개한 내용으로, 제목이 없었으나 〈동문선〉에는 〈풍왕서〉라고 되어 있으며, 〈화왕계〉라는 제목은 글의 내용으로 볼 때 후대의 학자들이 붙인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문왕은 어느 여름날 밤 설총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적한 마음을 풀고 싶다고 했다 한다. 그러자 설총이 옛날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꺼냈다. 온갖 꽃이 피어 있는 꽃나라의 화왕(花王)이 처음에는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사랑했다. 그러나 할미꽃이 나타나 "임금님께서는 좌우에서 온갖 물건을 넉넉히 공급해서 비록 기름진 쌀과 고기로 창자를 채우고, 아름다운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오나, 상자 속에 깊이 간직한 양약으로 원기를 돋우어야 하고, 영사(靈砂)로 독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충언(忠言)했다. 이에 감동한 화왕은 요망한 무리를 멀리하고 정직한 도리를 받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신문왕은 "그대의 우언이 참으로 깊은 뜻이 있으니 글로 써두어 임금을 경계하는 말로 하라"라고 했다 한다. 이렇게 설총은 할미꽃을 빗대어 바른 도리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화왕계〉는 의인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첫번째 작품으로 보이며, 고려 중기의 가전체(假傳體) 문학으로 이어져 내려와, 조선 중기의 〈화사 花史〉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5h228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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